그런데 하루아침에 어린 시절을 회수당한 채 과거 급제라는 도무지 현실 세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단 하나의 추상적인 목표에만 일생을 바치라고, 그것도 가족과 떨어져 외국에서 혼자 살며 이루라는 명령을 받은 소년의 마음이 과연 아무런 동요 없이 기계처럼 냉정하게 움직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소년 치원이 아무리 착한 아이였더라도 그의 마음에는 분명 카프카 같은 원망이(혹은 다른 형제들 말고 왜 내가, 하는 존재론적 의문이) 수시로 떠올라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 p.16, 「홀로 바다를 건넌 소년 _ 868년, 최치원」 중에서
이 시기 이윤수의 머릿속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과거에 합격시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윤수가 지금으로 치면 성명철학가쯤 되는 이들을 찾아 아들의 이름을 새로 받아왔으리라 믿는다. (중략) 뜻밖의 개명에 우리의 규보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어쩌긴, 두말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삼수생이 제 생각에는 말이지요, 어쩌고저쩌고하며 반대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은 결코 아니었으니.
--- pp.54~55, 「과거에 거듭 실패한 소년 _ 1183년, 이규보」 중에서
훗날 제자들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퇴계는 ‘세 번 연속으로 실패를 했어도 아주 의기소침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고백을 한 바 있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과거 급제가 그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응시생들에 비해 아주 높지는 않았으므로. 그런 퇴계가 이 서방이라는 호칭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인 것이다. 결국, 그도 속물이었다.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퇴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을 얻지 못한 까닭에 이런 욕을 당하는구나.”
--- p.67, 「학자와 관리 사이에서 방황한 소년 _ 1524년, 이황」 중에서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 이원수에 대한 사랑보다 몇 배는 컸다는 것! (중략) 율곡의 증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심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 하나.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눈물로 젖은 길고 긴 추모의 글을 썼던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어떤 추모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 pp.99~100, 「아버지를 원망한 소년 _ 1554년, 이이」 중에서
잇따른 죽음이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더라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던 소년 허균은 어떻게 해서는 슬픔을 이겨냈을 테고 그의 삶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는 훨씬 평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세상 이치에 대해 갖고 있던 허균의 생각을 뿌리째 뽑아버린 죽음이 또다시 이어졌다. 바로 아내와 아들의 죽음이었다.
--- p.143, 「죽음을 일찍 깨달은 소년 _ 1592년, 허균」 중에서
제가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하나, 공부하고 또 공부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을 널리 알리는, 그 시대 용어로 말하자면 입신양명하는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씁쓸한 희망이었다. 사실 제가는 서얼인 터라 이마저도 확실한 답은 못 되었기에. 그렇기는 해도 농사를 지을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는 끝자락 양반의 처지로서 노려볼 수 있는 건 공부의 영역뿐이었다. 그랬기에 제가는 어려운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이름난 사람들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져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 p.160, 「부당한 차별에 눈물을 쏟은 소년 _ 1761년, 박제가」 중에서
이보천과 박종채의 말과 문장을 종합하면 이 시기 지원의 상태를 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유난히 똑똑한 데다 모범에 대한 지향성이 강했던 원칙주의자 박지원은 당연히 성인(聖人)을 꿈꾸었을 것이고 그런 그의 눈에 보통 사람들의 행동은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지원은 유학을 공부한다고 떠들어 대면서도 겉과 속이 다른 세태,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교 경전이 제시하는 삶의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마구 일삼는 이들을 거의 강박증적으로 경멸하기 시작했다. 앞서 장인 이보천은 지원의 이런 강박증, 혹은 결벽증에 염려를 표했으나 사실 이보천은 지원의 증상을 악화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 pp.178~179, 「신경증에 시달린 소년 _ 1773년, 박지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