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기업 목록(또는 버핏의 포트폴리오)
이 책의 목차를 일별하기만 해도 독점 기업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알 수 있다. 2020년 현재 미국은 6개 주요 은행이 자금 대부분을 통제하고, 4개 항공사가 승객들을 미국 각지로 실어 나르며, 4개 주요 이동통신사가 통신망을 독점한다. 몸이 아프면 3대 약국 중 한 곳으로 가야 하고, 병원 치료에 필요한 거의 모든 용품을 거대 의료업체 가운데 한 곳이 공급한다.
더 구체적으로, 미국의 이유식 시장에서는 애보트 래버러토리(시밀락), 레킷 벤키저(엔파밀), 네슬레가 미국 시장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군사 무기 분야에서는 5대 기업(노스롭 그루먼, 제너럴 다이내믹스, 레이시언, 록히드마틴, 보잉)이 절대적 비중을, 민간 의료보험에서는 3대 기업(애트나, 시그나, 유나이티드헬스)이 시장을 완전히 지배한다. 미국인들의 맥주 선택권은 AB인베브(500개 맥주 브랜드)와 몰슨 쿠어스 둘 중 하나뿐이다. 얼핏 여러 브랜드가 경쟁하는 듯 보이는 시장도 소유 구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몇몇 지배적인 기업과 마주친다. 네슬레 한 기업이 2,000개가 넘는 브랜드를 소유하고, 힐튼호텔은 6대륙에 17개 브랜드 아래 5,500개 호텔 건물을 거느린다(독자들은 이런 독점 목록을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목록이 독점 기업가 워런 버핏의 포트폴리오와 상당히 겹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요점은 독점 기업이 단순히 한두 산업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 산업에 걸쳐 만연하고, 그 결과 이제 우리가 먹고 쇼핑하고 서비스를 받는 모든 것에 대한 선택권이 독점 기업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규모의 저주
독점 옹호론자들이 흔히 빠지는 착각이 있다. 기업이 커질수록 좋은 일자리을 만들고 질 좋은 제품이 생산되며, 가격도 싸질 것이라는 믿음이다(규모의 경제).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곧 독점 기업이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그 커진 규모와 시장 지배력 때문에 [규모의 저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소비자와 노동자가 겪는 문제로 좁혀 봐도 그 폐해는 적지 않다. 독점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 상품이 없기 때문에 자사 상품의 질을 높일 이유도, 가격을 낮출 이유도 없다(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근감소증 치료제 권장 소비자 가격은 무려 212만 5,000달러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또한 같은 산업 내에 경쟁사가 없거나 과점 기업들 간에 [침범 금지 협정] 맺고 있어서 근로자의 재취업과 임금 상승이 제한된다. 당연히 임금을 높이거나 근무 환경을 개선할 필요도 없다(노동 환경이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아마존의 한 중국 하청업체 기숙사에는 자살 방지 그물이 있다). 아예 직종 자체를 바꾸지 않는 새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는 불리한 근무 조건을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마불사]. 한 산업 부문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이상 독점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망할 것 같으면 정부나 알아서 구제해 준다). 2008년 미국 정부는 독점 금융 은행들을 세금을 쏟아부어 살려 냈고, 이는 한국의 대기업과 대형 은행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워런 버핏이 독점 기업을 신나게 수집하는 이유이고, 그에게 [독점 판별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이다.
독점 시대의 초상
이 책의 특징은 보통 사람들이 독점 기업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겪는 고통을 부각시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16시간 넘게 항공기에 갇혀 있던 케이트 해니 부부의 사례를 통해 항공 산업의 독점 구조와 그로 인한 서비스 하락을 보여 준다. 수익 증대를 위해 항공사들은 수십 년간 비행기의 좌석을 협소하게 만들었고, 오늘날 [4시간 이상 비행하는 승객 6,000명당 1명꼴로 심부정맥혈전증]에 걸린다. 또한 부가 수수료가 새로운 수익 창출 수단이 되면서, 항공사들은 좌석 배정, 온라인 예매, 담요, 탄산음료, 지갑보다 큰 휴대용 짐에도 요금을 매긴다(2017년에 미국 10대 항공사는 부가 요금으로만 297억 달러를 벌었다).
또한 저자는 최고급 병원 시설에 입원한 한 암 환자의 사례를 통해, 의료 물품 납품 업체의 독점 구조를 고발한다. 식염수액 주머니가 품절되는 바람에 황당하게도 간호사는 30분 동안 환자 옆 붙어서 정맥주사를 펌프질해야 했다. 특정 기업이 공급 루트를 독점할 경우, 흔한 물품조차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또한 구치소에 수감된 남편을 면회하는 한 여성을 통해 독점화된 교도 시설의 착취 실태가 드러난다. 교도소는 [죄수 임대]라는 이름으로 재소자의 노동력을 직접 착취하거나(재소자는 홀푸드, 마이크로소프트 등 사기업체의 농장이나 하청 공장에 저임금으로 임대된다), 각종 수수료를 받는 식으로 재소자의 가족을 착취한다(독점화된 민영 교도소는 영상 면회, 영치금 송금 수수료, 영치품 모두에 요금을 붙인다). 독점이 사회의 말단에까지 퍼져 있음을 보여 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또한 독점화된 경제가 승자독식 도시로 부(富)를 몰아주면서 지역 사회도 황폐해진다. 저자는 독점 기업 때문에 생겨난 필수재와 서비스의 공백 사태를 [사막]에 비유한다. 지역 언론이 무너지며 [뉴스 사막]이 생겨나고, 채산성 때문에 일부 소도시에 고속 인터넷 서비스 제공이 거부당하면서 [디지털 사막]이 생겨난다. 병원 통폐합으로 농촌 병원이 폐업하면서 [의료 사막]이 생겨나고,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1달러 상점]이 우후죽순 늘면서 [식품 사막]까지 생겨난다(1달러 상점은 보관상의 이유로 몸에 좋은 신선 식품은 취급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 [우리는 이 독점의 시대, 금권 정치인들의 시대, 중산층이 절망에 빠지고 번영으로 오르는 사다리가 부러진 이 시대에서 분투하고 있다.]
독점은 정치의 문제이다
저자는 올바른 경쟁은 [혁신의 씨앗을 뿌리며 경제를 보호하고, 민주주의가 번성하게 해준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레이건 시대 이후 40년간 독점 규제를 방치한 결과, 소비자 물가가 오르고, 노동자 임금은 줄고, 소비자의 선택지가 점점 좁아지고, 경제의 혁신과 성장이 멈춰 섰다(스티글리츠를 비롯해 많은 경제학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같은 거대 정보 기술 기업이 지배력을 키워 가고, 이제 신생 기업들의 혁신을 가로막는 새로운 장벽을 쌓고 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국은 이미 과거에 독점의 위협과 공정 거래를 가로막는 대기업의 횡포에 직면한 바 있고, 그런 파괴적인 관행을 규제하고 독점을 제어할 수 있는 법률과 제도를 두루 갖추고 있다. 결국 문제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정치이다. 저자는 독점의 힘 앞에 무기력한 정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시민의 의식과 행동을 요청한다. [독점은 가장 근원적인 문제, 즉 권력의 문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린다.] 독점 문제를 분명한 시대적 과제로 삼고, 반독점 운동의 새 불을 지피자는 주장이다.
독점 기업 문제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세계 경쟁력을 키워 온 한국의 대기업에 그대로 적용하긴 힘들다. 그러나 독점의 폐해가 종종 사회 이슈로 떠오르는 우리 사회에도(대기업의 하청업체 착취와 임금 격차, 중소기업 기술 탈취 문제, 거대 정보 기술 기업들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등) 진지하게 고민할 이유와 지점들을 제시한다. 추천사를 쓴 포드햄 대학교 티치아웃 교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독점 기업이 몇 안 되는 영역에서 문제라고 모호하게 생각하겠지만, 읽고 난 뒤에는 모든 곳에서 독점 기업이 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한국 사회의 독점 문제가 더 선명하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