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내가 아는 히말라야는 처음도 끝도 네팔이었다. 그래서 파키스탄 역시 네팔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와서 보니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달랐다. 눈앞에는 빙하가 펼쳐져 있는데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온갖 야생화로 빼곡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극한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야생화라니,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본 물건을 마주한 아이처럼 이곳이 이상하면서도 신기했다. 그리고 무척 마음에 들었다. 파키스탄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몸을 낮추고 야생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p.77, 「Chapter 1 벌거벗은 산(낭가파르바트 페어리 메도우/루팔)」
고산에 적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천천히 걷는 것이다. 자기 체력만 믿고 빨리 걷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고산 적응에 실패한 사람 중에는 의외로 산행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많다.
--- p.102, 「Chapter 2 빙하 대탐험(비아포-히스파르빙하)」
양탄자 같은 빙하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출발한 마부와 당나귀 무리가 작은 점으로만 보였다. 그대로 이 빙하를 따라가면 좋으련만. 다시 빙하 가장자리로 향했다. 얼음과 바위가 섞인 길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사라져버렸다. 얼음은 작은 산이 되어 앞사람을 지워버렸고 바위는 발자국을 삼켜버렸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 p.113, 「Chapter 2 빙하 대탐험(비아포-히스파르빙하)」
무너지는 비탈길을 지나 언덕에 오르니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 줄로 걷는 사람들이 꼭 이사 가는 개미 떼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인간은 특별하지 않았다. 누구나 이 속에 들어오면 크레바스 사이에 낀 돌멩이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자연의 일부로 돌멩이가 되고, 꽃이 되고, 인간이 되었다.
--- p.114, 「Chapter 2 빙하 대탐험(비아포-히스파르빙하)」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 언저리에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우월한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보다 조금 더 잘 살기는 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쌍하거나 불행한 건 아니다. 우리가 이곳에 동정을 베풀기 위해 온 건 더더욱 아니다.
--- p.149, 「Chapter 2 빙하 대탐험(비아포-히스파르빙하)」
난폭한 강 위에는 허술하게 매달린 다리 하나가 전부였다.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다리 위로 강물이 내뿜는 침방울이 거침없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 떨어지면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가이드북 내용이 떠올랐다. 왜 이런 상황 앞에만 서면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는 건지. 다리를 건너는 짧은 순간에도 별 흉측한 생각이 다 들었다.
--- p.158, 「Chapter 3 신들의 광장(K2 트레킹-곤도고로라)
먼 길을 가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거리 두기’였다. 인간적인 친절함의 적당함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선을 지켰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런 감정들이 쌓이다 보면 혼자서 먼 길을 갈 수 없다.
--- p.165, 「Chapter 3 신들의 광장(K2 트레킹-곤도고로라)」
여행은 좋았던 사람에게서조차 최악의 감정을 끌어내기도 한다. 생사를 걸고 등반한 원정대 동지와 원수가 되고, 연인이나 부부가 헤어지고,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순식간에 틈을 벌릴 수 있는 게 여행이었다.
--- p.171, 「Chapter 3 신들의 광장(K2 트레킹-곤도고로라)」
저 어마어마한 산 위에 올라가기를 꿈꾸기보다, 산 아래서 산을 올려다보는 자체가 좋다. 산 아래 여러 길을 찾아다니며,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는 일. 삭막한 히말라야를 걷다가, 눈 덮인 히말라야를 만났다가, 거대한 빙하 지대를 지나기도 하는 일. 전문 장비 없이 나의 두 발만으로도 갈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두루두루 찾아다니면서 산 아래서 산을 보는 일이 즐겁다.
--- p.184, 「Chapter 3 신들의 광장(K2 트레킹-곤도고로라)」
물을 건너던 유수프가 미끄러지더니 그대로 떠내려갔다. 한낮이라 빙하가 녹아서 물이 넘쳤다. 그는 금방 털고 일어났지만, 운동화와 바지가 흠뻑 젖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넘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았다. 책임감이 무척 강했다. 고맙고 또 미안했다.
--- p.194, 「Chapter 3 신들의 광장(K2 트레킹-곤도고로라)」
저녁 무렵 빙하 둔덕을 넘어가는 포터들을 홀린 듯 따라가다가, 그들의 마지막 옷자락이 사라지는 걸 보고 그대로 멈췄다. 황홀한 풍경 앞에서 나는 그만 얼음이 되고 말았다. 온통 하얀 세락이 가득한 곳, 삐죽삐죽 솟은 세락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얼음의 파도였다. 얼음의 숲이기도 했다. 세락 어딘가에 얼음 요정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찬찬히 고개를 들어, 너무 높아서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K2를 바라보았다. 아득한 꿈속을 걷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히말라야에 와 있는 것처럼, 순간 모든 것이 생소해졌다. 정지된 화면 속의 나를 다른 곳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
--- p.195, 「Chapter 3 신들의 광장(K2 트레킹-곤도고로라)」
설사 자유의 옷을 입고 있다 한들, 몸이 자유로울 뿐 영혼엔 걸림이 많았다. 먹는 것도, 사람도, 좋고 싫음도, 모두 타인에게 의지하며 ‘취향’이란 이름으로 걸림을 합리화했다. 여행자란 신분의 욕망을 가득 채우고, 자유란 이름의 번지르르한 포장을 둘렀다.
--- p.228, 「Chapter 4 비밀의 정원(K6·K7 베이스캠프/아민브락 베이스캠프)」
길에서 만난 사람과는 뜨거운 감정보다 덤덤한 마음이고 싶다. 그곳에서 만난 소와 염소처럼 서로에게 풍경이 되었으면 한다. 편지 쓰기를 좋아하던 소녀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중년의 나는 관계에 덜 연연한 사람이고 싶다.
--- p.241, 「Chapter 4 비밀의 정원(K6·K7 베이스캠프/아민브락 베이스캠프)」
나는 ‘천천히 걷는 것’을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속도라고 생각한다. 조금 느리게 걸어도, 조금 빠르게 걸어도 자신에게 최적화된 걸음이 있을 테니 ‘천천히’라는 개념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건 취향과 속도가 비슷한 사람들과 다니는 것.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 p.285, 「Chapter 6 위대한 풍경(스판틱 베이스캠프)
삶이 그렇듯 여행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행복, 괴로움, 슬픔, 미움, 질투가 공존한다. 삶이 장편소설이라면 여행은 단편소설이다. 압축적이면서 조금 더 매혹적이다. 그래서 여행은, 짧은 순간이나마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무의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 p.292, 「Chapter 6 위대한 풍경(스판틱 베이스캠프)」
하산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엄청난 설산과 빙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빙하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이 산을 믿는 것처럼 산을 걷는 나도 산을 믿었다. 일단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이해가 불필요했다. 오로지 믿음이었다. 거대한 산에 들어서면 걷고 있는 모든 것은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바람의 일부가 되고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 p.300, 「Chapter 6 위대한 풍경(스판틱 베이스캠프)
나는 낯선 사람들과 여행을 하면서 진상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나도 진상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멋진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내가 진상들에게 집중할수록 나는 그들을 욕하면서 닮게 될 것이고, 멋진 분들에게 집중할수록 풍요로워지고 고마운 마음도 커질 것이다. 좋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여행의 축복이 아닐까.
--- p.347, 「Chapter 8 야생화 천국(탈레라/이크발탑)」
히말라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나는 이번에도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 뜻대로 잘 되진 않더라도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 모두에게 찰나의 안녕과 고마움을 전한다. 모두의 무사함에 대해, 그곳에 계신 신께도.
--- p.356, 「Chapter 8 야생화 천국(탈레라/이크발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