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들의 안식처가 된 보린원과 더불어 영락교회는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주일예배를 2부로 드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는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급격하게 증가해 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주일예배를 2부로 나누어 드리게 된 것이다. 한 목사는 교회를 신축해야겠다고 의논하고 그 일을 진행하게 된다. 당시 피난민들로 구성된 성도들이기에 헌금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 목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건축 보조금을 청원하여 2만 달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노력으로 마침내 교회 기공예배를 1949년 3월 24일에 드리게 되었으며, 1950년 5월 교회당 350.5평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의 영락교회 성도들 4천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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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워지고 마침내 1973년 8월 19일 주일에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월 18일부터 23일까지는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여의도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외국 성도 5천 명을 포함하여 5만 성도가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4일 주일에는 여의도 성전 헌당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때의 성도의 숫자는 1만 2천5백여 명에 이른 것이다. 실로 괄목할 정도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1961년 10월에 서대문에서 개척한 교회가 1973년 9월에 1만 2천5백여 명의 성도로 부흥이 된 것이다. 12년여 만에 이렇게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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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도는 6·25 한국전쟁 중 평양 비행장에서 유엔군 낙하산 부대가 내려오던 날, 북한군 연락병과 같이 남으로 도망치다가, 생사의 기로에서 소나무를 끌어안고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저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겠습니다.” 그는 새벽까지 그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고 한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던 날, 4년 전의 서원하던 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수백 번을 기도했다고 한다. 총알이 빗발치고 함께 군생활 하던 전우들이 자신의 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데도 그는 기적같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한번은 최전방에서 중공군과 맞닥뜨려서 포위되었을 때 1개 소대만 남고 다 전멸하던 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자신이 담장 밑으로 뛰어가는데 “집중 사격!”이라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향하여 따발총 세례가 퍼부어졌다. 수백 발의 총알이 자신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한발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 죽음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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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전에 김삼환 목사가 교회를 개척할 때에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친구들도, 그리고 사업이 잘되고 있으며 믿음의 생활을 하는 친척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이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바라고 기도하니 하나님의 손이 김 목사를 만지시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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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한국전도집회의 통역을 의뢰받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대단히 기뻐했으나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모교인 밥존스신학대학으로부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신학적인 노선의 차이였다. 김 목사는 48시간을 달라 하고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명백한 성령님의 지시를 받게 된다. 즉, 밥존스 출신의 김장환이 아니라 주님의 종 김장환이 되라는 것이었다. 주님은 그의 배경인 ‘밥존스’를 내려놓기를 원하셨다. 그의 자랑인 ‘밥존스’를 폐기하기 원하셨다. 스스로 ‘밥존스’의 동문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길 원하셨다. 오직 주님만이 배경이며 자랑이길 원하셨다.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만족하길 원하셨다. 그는 즉시로 통역을 하겠다고 통보하면서, 주님의 종으로서 김장환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 것이다. 한경직 목사의 주도로 개최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집회는 5일 동안 320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단위 집회였으며, 여기에 지방(대구,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춘천)의 집회 150만여 명까지 합하면 연인원 470만여 명이 참여한 집회였다. 연인원으로도 세계 최대의 전도대회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 집회의 통역을 맡으면서 더욱더 큰 꿈을 가지게 되었으며, “주님 제가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 되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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