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힘들겠지만, 악의 폭력, 폭력적 악을 이기는 길은 오로지 비폭력 ? 평화의 정신으로 살신성인하려는 실천밖에 없음을 이 책으로 여러분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백 년 전 유관순 누나의 살신성인의 그 신앙 그리고 해방 후 혼란기 때 손양원 목사님의 원수사랑 실천의 그 우아하고 감동적인 본보기 삶이 그리워집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사자가 풀을 먹는다(사 1:7)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좀 더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풀을 먹는다는 것은 피 흘리는 일을 중단한다는 뜻입니다. 사자가 약한 초식동물을 주식으로 삼을 때 반드시 피를 흘리고, 죽이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
풀을 먹게 되면 반드시 소처럼 반추해야 합니다. 씹고 되씹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가해자, 피해자의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세력이 자기반성을 계속해야 함을 뜻합니다. 소가 여물을 먹고 씹고 되씹는 시간은 편안한 평화의 시간입니다. 눈을 부라리며, 증오하며, 대결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은 외부의 원수나 주적이나 마귀에 대항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집체적 단합, 그것도 거대한 단합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기를 철저히 비워서 남을 채워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놀랍게도 이 같은 과정에서 예수는 단 한 번도 큰 소리로 핏대 세우며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히 두 번이나 몸을 낮추어 조용히 땅에 글을 쓰셨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그 글이 주는 메시지는 결코 조용하고 무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악했던 자들의 주먹 쥔 손이 발선(發船)으로 풀리면서 그 여인은 마침내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
--- 「1부_ 발악을 이기는 발선의 힘」 중에서
오늘 한반도에 사는 예수따르미들은 지난 반세기 이상 같은 민족을 더욱 미워하고, 더욱 불신하고, 더욱 박살 내야 한다고 부추겼던 냉전체제와 냉전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극복해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평화를 이 냉전의 외딴섬 한반도에 우뚝 세우는 복음 사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
새 하늘과 새 땅, 새 질서는 보복을 통해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힘, 곧 가난한 자, 눌린 자, 못 보는 자, 포로 된 자 등 처절한 세속의 경쟁에서 억울하게 탈락한 꼴찌들을 더욱 사랑하는 힘으로만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원수와 주적은 증오하고 그들에게 보복적 응징을 가함으로써 하나님의 평화가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갔던 로마제국의 권력과 예루살렘 성전 권력(로마 권력의 하수인이었던)의 제도 폭력 앞에서 사랑의 힘을 몸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로마식 칼의 힘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우아하게 감당하셨습니다. …
우리가 지난 70년간 분단 체제에서 강고하게 형성된 이 같은 적대적 공생관계를 참다운 그리스도의 복음 능력으로 청산하지 못하면, 한국기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감동적 동력을 상실한 한국교회를 보며 이제는 역설적으로 세상이 염려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분단 70년을 맞으며 단 한 번도 우리 민족이 광복과 해방의 환희를 누리지 못했음을 뼈아프게 성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따르미로서 “평화만드미peacemaker”가 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분단 70년에 한국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진지하고 참담하게 스스로 물으면서 참회의 성찰을 해야 합니다.
--- 「2부_ 나를 넘어설 용기: 자기 비움의 힘」 중에서
예수님의 출생지나 성장지 모두 변두리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거주지였습니다. 당신의 활동무대도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땅으로 경멸받던 곳이었고, 그곳은 흑암의 백성들이 살았던 죽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
예수님의 애정 어린 관심도 바로 변두리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첫 메시지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와 같은 변두리 인간의 온전함(구원)을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예수님은 앉은뱅이, 눈먼 자, 귀머거리, 가난한 자, 죽은 자와 같은 비인간화된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강력하게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손 마른 장애인이 아니었던가를 되돌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활짝 펴고 힘껏 뻗어 변두리에서 한 맺혀 사는 인간들을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지대로 옮겨 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들을 중심부로 불러내시면서 온전케 된 손을 남을 위해 더욱 힘껏 뻗기를 갈망하시는 우리 주님을 쳐다봅시다. 우리를 위해 손과 팔만 펼쳐주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려 피와 땀 그리고 온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성육신은 신비한 사건이면서도 엄청난 변혁을 동반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지금도 진행되는 사건입니다. … 가장 비참한 팔레스타인의 역사 현실에 오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누추한 말구유에 오신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왜 화려한 궁전의 왕자로 오시지 않고 권력자의 장자로 오지 않으셨을까요? 역사의 현실에서 가장 억울하게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을(乙)의 자녀로 오신 것은 그 고통에 참여하면서 그 고통의 구조적 사슬을 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비폭력으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
--- 「3부_ 예수운동, 장벽 허물기 그리고 복음」 중에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접목되면서 토지에 대한 성서적 입장은 안타깝게도 거의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덕 지주 중에 기독교 신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교리의 두꺼운 옷을 입은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으로 예수에 관해 들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를 직접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영도 새롭게 직접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이룩하시려고 했던 그 뜻을 오늘 여기 우리의 상황에 재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닮기와 그리스도 닮기의 정신입니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했지요. 그것도 활짝 열린 잔치여서 온갖 불순하고 불결했던 사람들 곧 적빈자, 이방인, 여성, 지체 장애인, 세리, 죄인 등이 잔치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습니다. 열린 식탁공동체는 차별 없이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우리들”만이 아니라 “그들”도 식탁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의 인식은 기존의 계급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
우리의 여행은 출애굽의 여행과 같고,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는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 여행의 종착점은 평화와 정의, 자유와 존엄이 이슬비처럼 내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여행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고단하고, 어렵고, 괴로운 여행입니다. 그러기에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으려면 시공을 초월해서 함께 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 곧 부활의 예수를 항상 만나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 닮기와 그리스도 만나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
특히 우리나라는 강대국에 의해서 너무 억울하게 강점당하고, 강점이 끝난 후 분단 75년 동안에도 억울한 고통을 계속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떤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가’, ‘이러한 질서를 꿈꾸고 만드는 일에 왜 한국 기독교인들은 몸을 던지지 못하였나’, ‘말로는 몸을 던졌다고 하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던진 것은 아닌가!’ 우리 모두 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탕자의 비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과연 오늘 내가 돌아갈 집이 있는가? 그 집은 어떤 집이고, 어떠한 집이어야 하는가?
--- 「4부_ 진짜 멋진 새 질서를 향한 창조적 파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