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자기 본위의 생활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극히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비정한 자기 본위의 생활에 틈이 생기거나 흠결이 생기면, 수도는 끝장이 나고 선객이 태타에 사로잡힌 무위도식배가 되고만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비정해야만 견성이 길이 열리는 것이다. 전후좌우 상고하찰해 보아도 견성은 끝내 혼돈된 자아로부터 출발하여 조화된 자아에서 멈춰질 수 밖에 없다.
견성은 끝내 자아의 분방한 연역에서 적료한 자아로 귀납되어야 한다. 비정 속에서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이 바로 선객들의 생태이다.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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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없이 감자 유출을 막기 위한 비상책을 강구하던 원주 스님이 강릉을 다녀왔다. 손에는 큼직한 번호 자물통이 들려 있었고 틀림없이 고방에 채워졌다. 그러나 감자구이는 계속되었다. 그날 감자구이 당번은 40대의 원두 스님인데 이 스님은 묘한 습성이 있는 분이다. 어느 절엘 가거나 절간 방에 문이 채워져 있으면 돌쩌귀를 뽑아버린다. 중이 감출 게 무엇이 있으며 도둑맞을 것은 무엇이 있느냐면서 중생의 업고와 무명을 가두어 놓은 것 같이 갑갑하다는 지론을 가진 스님이다.
원주 스님이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잠궜던 고방문이 돌쩌귀째 뽑혀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주 스님은 언짢아서 우거지상을 지우질 못했지만 감자구이 동호인들의 희색은 만면하다. 원주 스님의 판정패다.
그렇다고 판정패를 당하고 선선히 감자를 대중에게 내맡길 원주 스님은 아니다. 와신상담의 며칠간 고심끝에 묘책은 강구되었고 드디어 실천에 옮겨졌다. 주로 부식의 원료가 감자 중심이다.
쌀과 감자의 비율이 6대 4이던 점심이 4대 6으로 뒤바뀌고 잡곡과 감자의 비율이 반반이었던 저녁은 3대 7로 되었다. 부식도 매끼마다 감자국에다 감자나물이 올랐다. 대중이 항읠르 하자 원주 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감자 먹기가 얼마나 포원이 되었으면 그 부족한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감자를 자시겠소. 스님들의 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감자 일변도의 메뉴를 짰을 뿐입니다. 일 주일 내로 메뉴표를 고칠 것을 약속합니다.'
대중은 틀림없이 감자에 질리고 말았다. 감자구이는 끝이 나고 동호인들이 뿔뿔이 헤어졌다. 인간 식성의 간사함을 잘 파악하고 이용한 원주 스님에게 판정승이 돌아갔다. 역시 살림꾼인 상원사 원주 스님다운 책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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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의 역사는 뒷방에서 이루어진다. 뒷방의 생리를 살펴보자. 큰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다랗게 놓인 방이 뒷방(혹은 지대방)이다. 일종의 휴게실이다. 개인 장구가 들어 있는 바랑이 선반 위에 줄줄이 담을 쌓고 있어서 누구나가 드나든다. 휴게 시간이면 끼리끼리 모여 앉아 법담을 주고 받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길게 드러누워, 결가부좌에서 오는 하체의 피로를 풀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 옷을 꿰매는가 하면 불서를 보기도 한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일기도 쓴다.
어느 선방이거나 큰방 조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법력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병기와 구변이 결정짓는다. 큰방에서 선방의 정사가 이루어진다면 뒷방에서는 야사가 이루어진다. 선방에서는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에 의해 우세가 결정되기도 한다.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은 스님은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고,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은 스님은 점차로 선객의 옷이 벗겨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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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은 끝내 자아의 분방한 연역에서 적료한 자아로 귀납되어야 한다. 비정 속에서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이 바로 선객들의 생태이다.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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