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흘렀어요”
책을 펼치다가, 오래전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읽다가, 음악을 듣다가도, 산책길에서도 아들은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했다. 그 당시 아들은 무엇을 할 때도 눈물이 나고 무엇을 하지 않을 때도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울었어요”보다 “눈물이 났어요”라고 말할 때 아들의 마음이 더 절절하게 느껴졌고 내 마음 또한 미어졌다.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 때 나오는 눈물과 비교해서 마음은 몹시 아프고 괴로운데 그것을 혼자서 안으로 삭여야 할 때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닦을 새도 없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더 서럽다.
‘서럽다’는 ‘원통하고 슬픈’ 마음이고 ‘원통하다’는 분하고 억울함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서 나를 자꾸 아래로 끌어내리는 ‘감정 덩어리’ 때문에 생기는 느낌이다.
‘억울하다’에 맞는 영어 단어는 무엇일까? unfair 또는 unjust 단어를 쓰기도 한다. 우리 말의 뉘앙스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공정하지 않은 것, 부당하고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그 감정이 ‘억울하다’로 표현된다.
아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동안 자신이 받은 공정하지 않았던 대우, 공평하지 않았던 대접들이 모여서 만든 억울함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소리 나지 않는 방울이었다.
아들이 갖고 있는 소리가 나지 않는 방울은 쥐들이 모여서 고양이 목에 달아 놓고 싶어 했던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진 것’과는 다른 방울이었다.
소리 나지 않는 방울 소리를 들은 지금 내가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것은 이미 내가 그렇게 한 것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또한 많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지금 중요치 않다. 지금 내가 할 일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 따른 뒷마무리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뿌린 씨앗이니 그 열매는 내가 거두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는 책임까지도 함께 선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 p. 27, 「눈물 한 방울」 중에서
지금 아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비극은 언제나 비교에서 시작된다고 말하지만,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우정을 쌓아가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인데 우리 아들은 집에서 무거운 철학책을 탐구하며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공정함과 불평등, 정의와 불의에 대하여 온 시간을 쏟아붓는 이 생활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 상황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부모의 옳은 태도일까?
‘지금의 너는 문제가 없어. 이대로 충분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그들처럼 할 필요도 없어. 그들이 너보다 나은 것도 아니니까’라고 격려를 하는 것이 나의 진심일까?
내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지금 괴로운 것이 약이 되는 자연스런 과정인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바꿔보겠다고 집착하면 할수록 모두가 힘들어질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에서 바꿀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일을 구분하면 그 안에서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지금 진짜로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엄마로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일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 p. 54,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중에서
나는 오해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해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있었다. 내가 힘들게 일하는 것은 자식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채워주면 최고의 엄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는 현실적인 핑계로 워킹맘이 아이들에게 쉽게 저지르는 실수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그리고 나서는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큰소리쳤다. 심지어는 그렇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불쌍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잘 키우고 싶은 생각이 너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안에 나의 수고를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은 내 욕심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뒀어야 하는 것은, 아들은 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고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였는데 나는 이 부분을 놓쳐버렸다. 아들이 진정으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까’보다는 ‘이 아이가 부모인 나에게 무엇을 원할까’ 특히 ‘내게 어떤 말을 듣길 원할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잊지 말자.
--- p. 147, 「하얀색 거짓말」 중에서
코칭을 공부하면서 조하리의 창Johari’s window 이론을 배웠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이 있는지를 4가지로 나눠서 분류한다.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 ‘열린 창’
나는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숨겨진 창’
나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아는 ‘보이지 않는 창’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미지의 창’이 있다.
이 네 가지의 창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나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들의 많은 장점이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분에게는 ‘열린 창’ 안에 있었다. 아들은 본인이 이런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설마 남들에게는 보이는 이 많은 장점을 ‘보이지 않는 창’에 가둬놓고 본인은 재치와 유머 그리고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 4가지 영역의 넓이는 살면서 계속 변화한다. 만약, 내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나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면 내 마음의 숨겨진 영역은 줄어드는 동시에 열린 공간은 늘어간다. 그만큼 상대방과 내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 사람과는 친밀한 관계에 이른다. ‘숨겨진 창’에 있는 아들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며 지지를 하고 ‘미지의 창’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는 엄마이고 싶다. 아들을 더 정확히 알고 싶다. 알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관심이 있고 가까워지고 싶어서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마음을 열면 열수록, 가슴을 활짝 펼치면 펼칠수록 아들과 나와의 불신의 공간은 줄어들고 소통의 공간은 늘어난다. 아들과 연결된 모든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아들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살맛이 난다.
--- p. 188, 「사회복무요원」 중에서
거리를 걸으며 아들에게 질문을 한다.
아들아 네가 이곳에서 성취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니?
이곳에 있는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니?
네가 기대하는 1년 후 너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일주일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 두 아들이 배웅을 나왔다. 이제부터 매일매일이 특별한 하루가 될 둘째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했고 이제부터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실제적인 보호자가 되어야 할 큰아들에게도 고맙다고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 아들이 지금 저 밑에 있구나. 잠시간 볼 수 없는 두 아들을 이곳에 두고 떠나는 마음도 이렇게 짠하고 슬픈데 이 세상에 두 아들을 남기고 아주 떠날 때는 얼마나 서러울까 하는 괜스레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 주연으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엄마를 잊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아빠를 보다 못한 어린 아들 조나가 새엄마를 구한다고 방송국에 보낸 사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화다. 엄밀히 말하면 조나는 새엄마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새 아내를 구하고 싶다는 말이 맞겠지만 말이다.
아들이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면 내가 그 시간을 함께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게이머이기를, 아들이 도덕과 정의를 주장하며 철학적인 이야기를 펼치며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볼 때는 내가 철학자이기를, 마음속에 간직한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는 그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하며 위로를 주는 상담 선생님이기를 바랐다.
내가 엄마로서 부족하고 많이 모자란다고 느낄 때는, 아들이 나보다 훨씬 좋은 엄마를 만났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내 아들에게 꼭 맞는 ‘새엄마’를 만나게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엄마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시애틀로 날아온 아들아! 오늘 하루도 수고가 많았구나. 편안하게 푹 자고 일어나렴. ‘시애틀에서 꿈을 이루는 아침’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 p. 211, 「시애틀에서 꿈을 이루는 아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