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는 생태학적 비상사태를 맞고 있다.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이 이 비상사태를 맞고 있다. 이 비상사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목숨을 위협하고, 불의와 소외가 짓누르는 무게로 이미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압력을 행사한다. 이것이 생태해방신학의 중심 질문을 야기한다. “구원과 해방과 창조세계 돌보기(the care of creation)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구원과 해방과 창조세계 돌보기의 관계에 대한 이런 질문은 교회가 세상과 연대하여 오늘날 시급히 씨름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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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2021년 6월 현재 420ppm이며, 매년 평균 2.3ppm씩 증가한다. 현재 지구 평균온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1.2도 상승했고, 10년마다 0.2도씩 상승하기 때문에, 파리협약의 제한 목표인 1.5도 상승은 2036년이다. 그러나 세계기상기구[WMO]는 450ppm에 도달할 2036년에 섭씨 2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1.5도 상승까지 탄소 예산은 7년 남았다. (섭씨 1.5도 상승하면 산호초의 70?90%가 죽지만, 2도 상승하면 99%가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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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섭씨 1도 오를수록 옥수수는 수확량이 17%씩 줄어든다. Lester Brown, The Great Transition (New York, NY: W. W. Norton, 2015), 6쪽. 벼는 개화기 때 한 시간 이상 섭씨 35도 이상에 노출되면 수분에 문제가 생겨 흉작이 된다.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가뭄으로 인해 2020년대부터 미국 중부와 멕시코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농업이 “실질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한다. Gwynne Dyer, Climate Wars: The Fight for Survival as the World Overheats (Oxford: Oneworld Publications, 2010), 47, 159쪽. 그래서 나오미 오레스케스 교수는 2040년대에는 “북반구 대도시들에서 식량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Naomi Oreskes and Erik M. Conway, The Collapse of Western Civilization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25쪽. 한편 2019년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5.8%, 곡물자급률은 21%이며, 쌀 자급률은 90%이다(농축유통신문, 2021년 3월 30일). 농촌경제연구원은 기후변화로 인해 2050년 쌀 자급률이 47.3%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영남일보, 2015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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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조차 2019년 5월 갤럽조사에서 미국인 43%가 사회주의 형태를 요구하며, 18-24세 연령층에서는 61%가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정도로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 Fareed Zakaria, Ten Lessons for a Post-Pandemic World (New York, NY: W. W. Norton & Co., 2020), 57쪽; William I. Robinson, The Global Police State (London: Pluto Press, 2020),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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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우주론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우주 이야기”는 복잡화(물질이 생명이 되고, 생명이 더 복잡한 형태의 생명이 되는)가 우주 역사의 불가피하고 자연스런 목적인 것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고등생물은 우주의 진화 과정을 통해 이들보다 먼저 존재했던 하등생물의 멸종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가차 없이 등장한다. 따라서 지구상의 생명의 경우, 대량멸종을 포함해 생물종 전체에 걸쳐 경험하게 되는 고통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은 이들의 비극을 통해 고등생물이 출현하게 된다는 설명으로 퉁쳐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주 역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역사의 승리를 기뻐하는 승리주의자의 의견이 된다.
--- p.43-44
그러므로 죄로부터 구원받아 그리스도교 신앙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드라마는 세상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pro nobis)’ 일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결국 세상 속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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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띠에레즈의 개념은 역사적 현실의 신학적 차원이 (교회 공동체의 매개를 통해) 문화적/심리적 차원과 사회구조적 차원에 정보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구띠에레즈에게 그리스도교 계시와 복음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교회 공동체는 총체적 해방 과정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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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역사 속에서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죄가 왜곡한 삼중의 친교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세상이라는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로 돌아감으로써 역사 속에서 성령의 사역에 동참한다. 따라서 인간을 하느님의 뜻에 좀더 깊게 개방하는 과정인 자기비움의 과정은 인간을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지구와의 연대로도 인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 해석을 통해서 볼 때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이자 하느님, 이웃, 지구와의 친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 p.125
창세기 원역사의 첫째와 둘째 이야기 덩어리(cycle) 사이의 유사성은 중요한 통찰을 보여준다. 즉 하느님은 세상이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번성하기를 바라시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그 평화를 깨고 세상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혜를 추구한다.
--- p.172
“신명기 사가가 이집트를 ‘용광로’(신 4: 20)라고 명명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산업사회의 전형, 즉 태우고, 노예에게 끊임없이 일할 것을 요구하고(고대 산업 기계의 매우 값싼 연료), 자신이 소모될 때까지 소모하는 산업사회의 성경 속 전형이기 때문이다.”
--- p.200
구띠에레즈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히브리인들은 “비인간(nonpersons)”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타당성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의 병든 정치적 생태론이 칭송받기 위해서는 이런 정체성이 필요하다. 이런 정체성을 수용함으로써 이 백성은 광야의 위험과 (광야의 불안정한 성격 때문에 필요해지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파라오에게 복종함으로써 얻는 안전을 선호하게 된다.
--- p.205
팔복은 세상이라는 동산이 더 이상 지배체제의 논리에 의해 계산되지 않고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구성되는 시기에 대한 비전을 말한다. 물론 각각의 복이 하느님이 땅의 표면을 새롭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 선포 중 오늘날의 분석에 가장 관련이 큰 것은 마태복음에 유일한 내용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 p.239
캐서린 켈러는 계시록 전체에서 작동하는 이항 대립식 수사법(the binary- oppositional rhetoric)과 이런 수사법이 이끌어내는 실천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 점에 대해 캐서린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메시아의 해결책을 바라면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가 계시록의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 없다면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식이다. 구원 아니면 저주인 것이다.”
--- p.248, 각주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살던 시기에는 로마의 부에 대해 비판적 평가가 만연해 있었다. 검소함, 소박함 등 로마의 전통적인 덕목을 상실한 것에 대한 도덕가들의 푸념이 도미티아누스의 통치가 쇠퇴하던 시기에 확산되었다. 하지만 보컴은 요한의 예언이 도덕가들의 한탄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가들이 이상적인 로마 문화의 가치를 잃는 것을 우려하는 반면, 요한이 로마의 경제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은 이런 경제체제가 제국의 변두리에 있는 피지배 백성들에 대한 착취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보컴은 이렇게 말한다. “요한은 로마의 부가 제국으로부터 얻는 이익, 즉 제국 백성의 희생으로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 p.250
폴라니는 유럽에서 파시스트 정부들, 즉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고 신화적인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강령을 가지고 권력에 오른 정권들이 들어서도록 기름을 부은 것은 시장사회의 약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사회의 절박한 반응이었다고 주장한다. 폴라니는 또 이렇게 주장한다. “파시즘의 승리가 사실상 불가피했던 것은 [경제적 자유주의가] 계획, 규제, 통제 등과 관련된 모든 개혁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 p.269
간단히 말해, 세계화 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 신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계화 프로젝트 입안자들은, 터져 나오기 시작한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 앞에서 그 타당성을 유지해야만 했다. 바로 여기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구성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용어가 정치경제적 담론에 등장하게 된다.
--- p.304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화 프로젝트가 전 지구적 비상사태의 정치-생태론적 차원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하며, 세계화 프로젝트의 생태론을 “자기만족과 경박한 무책임을 부추기는 거짓되거나 피상적인 생태론”이라고 부른다(59항). 요컨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화 프로젝트를 통해 촉진된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이 현재 우리를 둘러싼 정치-생태론적 비상사태를 회피/외면하는 결과를 낳는 은폐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세계화 프로젝트의 지속 가능한 개발 체제 안에서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악행들을 알아채고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중요한 결정을 뒤로 미루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악행들을 조장하는 길입니다”(59항)라고 교황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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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극단적 빈곤에 처한 인구는 1990년 19억 명에서 2018년 6억 5천만 명으로 감소했지만, “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앞으로 몇 년 동안 7천만?4억 3천만 명이 다시 극단적 빈곤에 처해질 것으로 예상한다.”(Fareed Zakaria, Ten Lessons For A Post-Pandemic World, New York, NY: W. W. Norton & Company, 2020, 151, 154.
--- p.325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지배를 위한 칼과 방패를 동산지기의 보습과 낫으로 바꾸는 일에 더 온전히 헌신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땅과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과의 연대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이런 구체적인 행동 하나가 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