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우리가 직면하는 종교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러해야 하는 때인 것 같습니다. 해답이라고 이해해 온 종교가 정치사와 다르지 않게, 그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이 종교적이기를 지속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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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과 웰다잉의 시대! 방점은 죽음과 삶보다는 ‘잘’에 찍힌다. 이제 종교도 그에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 사용가치에 따라 값이 매겨지고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볼 때 이미 충족된 불사와 영생이 오히려 악몽이 될 수 있음을 엿본 현대인들에서 불사와 영생을 말하는 종교는 뒷북치는 이야기, 시류에 동떨어진 촌스러운 메시지로 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현대인의 모든 일상뿐 아니라 종교 담론도 주도하고 있다. 죽는 것보다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것, 고통 속에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을 소진하는 것, 고통을 대물림해야 하는 것, 삶이 죽음보다 끔찍해지는 것이야말로 더 철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라는 옛 속담의 공감대가 사뭇 약화된 이러한 현대 종교문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익숙한 종교적 물음과 해답을 되묻고 그 유효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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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종교’라고 하는 개념이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정치적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푸에블로인의 경우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중국의 유교(비)종교론, 일본의 신사(비)종교론, 그리고 한국의 단군상 논쟁에 이르기까지 ‘종교’ 개념의 정치적 효과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이는 서구 근대성의 영향을 받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개신교를 암묵적 모델로 한 서구 근대 세속주의의 자장 속에서 형성된 종교 개념이 식민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으로서, 종교는 어떤 본질을 지닌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의 욕망에 따라 끊임없이 그 내용이 (재)형성되는 매우 불안정하고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임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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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을 강화하는 또 다른 요인은 종교계의 사회 서비스에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간의 복지자원은 종교계로부터 나왔다. 종교 교의에 따라서 어려운 이웃에게 재물을 보시하고 노력 봉사를 하던 전통이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사회복지사업으로 발달해 온 것이다. 오랫동안 자선의 역사를 거치면서 종교는 서비스 수혜자 개개인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점점 더 큰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전문화된 사회복지영역에서는 복지가 시민적 권리라는 인식이 커짐에 따라, 종교계 서비스는 더 이상 포교[선교]를 우선시할 수 없다. 모든 대상자에게 가치중립적인 서비스를 해야 한다.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복지현장에서는 더더욱 종교적 편향·강요가 금지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계 복지시설 중에서 특정 종교의 상징이 없는 곳은 얼마나 될 것이며, 실무자들이 종교적 권유의 유혹을 얼마나 잘 이겨낼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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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동물 사육 방식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돼지를 예로 들면, 어미가 핥거나 어미와 접촉할 수 없는 분만 틀에서 태어나, 태어나자마자 서로 싸우거나 물어서 상처를 내지 않도록 이빨과 꼬리를 잘리고 항생제를 맞고, 3주가 지나면 어미와 헤어지며, 두 달 만에 형제들과 헤어진다. 그리고 6개월 후에는 생을 마감한다. 암퇘지들은 3년 정도를 사는데, 일 년에 2~3번 인공수정을 통해 새끼를 낳아야만 한다. 이렇게 비참한 환경에서 자란 동물의 고기는 음식으로서도 부적격할 것이다. 이러한 이른바 공장제 동물 사육방식은 철저한 인간 중심적 생명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인간 외에 다른 생명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오로지 인간들만의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주체로 행세하는 세상은 왠지 삭막할 것 같다. 신의 말도 들을 수 있고, 귀신도 등장하며, 동물은 물론 나무나 돌 같은 자연물, 나아가 주변 물건과의 교류가 이뤄지는 세계가 보다 더 다채롭고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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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에 대한 지식, 특히 인간 마음/뇌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상보적이다. 마음/뇌에 대한 지식은 인공지능의 알고리듬 개발에 기여하고, 인공지능의 알고리듬은 마음/뇌의 작동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알파고가 불러일으킨 놀라움은 광의의 인간학에 남겨진 수많은 과제를 환기시켜준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의 알고리듬이 경이롭기는 해도 신비로운 것은 아니듯이 인간학의 여러 과제도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아니라 답변을 탐색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라고 불리는 복잡한 인간 삶의 양태를 연구하는 종교학자들에게도 분명히 유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종교학자들은 “왜 세계 (거의) 모든 곳의 사람들이 종교문화를 갖고 있는가?”, “왜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살해하고 자살하는가?”와 같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끈질기게 물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며,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실존적 물음까지도 더욱 적합한 질문으로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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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간보다 더 큰 세계에서 종교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접근법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른바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다. 애니미즘은 “생명, 숨, 영혼”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 용어다.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타일러(Edward B. Tylor, 1832~1917)의 애니미즘 이론은 인간만 영혼을 갖고 있다는 선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왜 ‘원시인’들은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도 영이 있다고 상상했을까를 추론하는 가운데 탄생한 이론이다. 타일러는 그들이 ‘합리적인 마음’을 가지고 죽음이나 꿈 등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 곧 종교가 생겨났다고 보았다. 아니마를 ‘영혼’과 연관 짓고, 애니미즘을 무생물 속의 영적 존재를 믿는 원시적인 종교로 규정하는 용법이 아직도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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