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는 위원회가 실미도 부대 창설 과정부터 4명의 사형 집행까지 관여했던 자들의 조사면담 내용을 중심으로 싣는다. 2부에서는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했던 사형수 4명의 육성을 공개하기로 한다. 이들 4명이 실미도에서 겪었던 3년 4개월, 총 4,860일의 기록이다. 소설과 영화, 그리고 수많은 기사와 영상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공작원들이 실미도에서 몸소 겪었던 내용들과는 거리가 먼 것도 있고, 사실을 왜곡·호도하는 내용도 많았다. 암매장 관련자들이 언젠가 입을 열 날을 기다리며, 이들 4명의 피의자 신문 조서와 사형집행 문서, 그리고 사형 집행장에서의 최후 유언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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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부대의 창설은 박정희와 김일성이 각각 개입하였던, ‘제2의 한국전쟁’이라 불리었던 베트남 전쟁이 배경이 된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각각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 “사회주의권의 국제적 의무”라는 명분을 표방하면서 직접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8년 ‘1·21사태’ 직후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해 공군이 책임을 맡아, 공군 내에 대북 보복으로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특수임무부대로 684부대가 실미도에 만들어졌다. 창설 직후 6개월 정도는 예산도 충분히 지급되었으나 1968년 말 베트남 전쟁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닉슨이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략) 박정희 정권은 닉슨 정권에 의해 대북 화해를 강요받았고, 이 과정에서 실미도 부대의 창설 목적과 임무는 폐기되었다. 중정과 공군의 무책임한 방기가 진행되면서 예산 전횡과 부대 관리 소홀이 이어졌고, 공작원들은 허기와 무력감을 느끼며 불만을 쌓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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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부대 공작원 (중략) 모집 대상은 주로 전쟁고아, 무연고자 등으로 미군 부대, 한국군 첩보부대 인근이나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남성으로 채워졌으며, 모집 마감이 임박하자 초등학교 동창인 7명의 옥천 청년 등으로 급하게 채워졌다. 주 임무는 ‘김일성의 목을 따 오는’ 것이었으며, 대우조건은 (1) 3개월 내지 6개월간의 훈련 (2) “월급 600불” (3) 신탄진 담배 지급 (4) 훈련 종료 후 소위 임관 (4) 임무 수행 후 미군 부대 등 취직 알선 등이었다. (중략) 31명은 ‘1·21사태’를 일으킨 북한의 124군 부대의 31명과 같은 숫자로서, 모집관들은 마지막까지 이 숫자를 지키고자 애썼으며, 신현준·강신옥·윤석두 등 마지막으로 입도한 3명은 부대 창설식이 임박해서 들어와 제대로 된 인적사항도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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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의 관리감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중정 실무담당 윤진원은 자신은 딱 한 번 실미도 부대를 방문하였으며, 모든 훈련은 공군이 책임지고 잘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늘 보고를 받았다면서 공작원이 훈련 중에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모른다. 없었다. 구두로도 받은 바 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공군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미도 현지에서 근무한 기간병들은 한결같이 위 사건들이 상부에 보고되었다고 사건 수사 과정에서 진술하고 있다.(재판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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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잊혀진 부대인 실미도 부대 공작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관련 자료가 상부로부터의 지시 또는 정식 문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문서 담당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기되었고, 사건을 입증할 물증이 사라짐으로써 온전한 사건의 실체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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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1년 11월 5일에 공군 보통 군법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재판장이 군사 보안상의 이유로 공판의 공개를 정지시켜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유가족들에게 통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략) 김이태는 본인이 김응수의 지시로 이들 4명에게 “베트남에 같이 가자”며 상고 포기를 종용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상고 포기 후 12월 29일에 사형이 확정되고 사건 발생 후 채 7개월도 되지 않은 이듬해 1972년 3월 10일에 이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p.140-141
이들의 사형집행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시신 처리와 매장 등 관련자 70여 명은 보안각서를 제출하도록 강요받았다. 사형집행 내용은 군사기밀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이들이 작성·제출했다는 보안각서는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그러나 오류동으로 추정되는 암매장지와 관련하여 아직도 관련자들은 보안각서를 핑계로 정확한 내용을 증언하지 않고 있고, 공군과 국방부는 예전의 벽제 매장설, 유실설만 주구장창 낡은 레코드판 돌리듯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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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유해 발굴 후 DNA 검사 결과 김기정, 정기성, 박원식, 김용환, 장명기, 이명구, 박기수, 장정길 등 총 8명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다른 시료들은 불량이거나 감정 불능으로 판명되었다. 이영수, 윤태산, 임기태, 황철복, 박응찬, 정은성, 신현준, 강신옥 등 공작원 8명의 유가족은 확인되지 않았고, 실미도 사건 당일 현장에서 사라진 이영수, 전균 등 2명의 시신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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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은 한국전쟁의 연장선, 즉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의 남과 북이 무력을 동원하여 폭력적 체제 경쟁을 추구하는 가운데 발생한 참사였다. “국가란 무엇인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1·21사태’와 이에 대한 보복 응징 대책 실패작인 ‘실미도 사건’은 ‘샴쌍둥이’인 남북의 호전적 정권 안보 세력들이 펼친 적대적 무력 정책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어떻게 국가 구성원들의 삶을 뒤틀리게 만드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많은 유사사건에서 그러했듯이 ‘실미도 사건’에서도 정권보위를 부르짖는 자들은 사건을 축소·조작·왜곡·은폐하였고, 공작원들의 인권보호는커녕 이들을 인간 병기로 만들어 분단 갈등의 폭력적 대결에 써 먹으려는 생명 경시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가 폭력은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이다. ‘국가’란 이름 뒤에 숨어 수많은 사람을 해쳤던 비열한 인간들을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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