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 사원 근처 소란스러운 시장 골목, 한 식당에 들어선다. 덥고 습한 기후 속 향신료 냄새는 더욱 진하게 다가오고, 처음 보는 음식에 나는 코를 들이댄다. 지역의 고유한 환경과 역사는 그곳 냄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카이로의 오래된 향수 가게, 인도 갠지스강 하류 거대한 늪지대의 진흙 냄새, 모로코 가죽 작업장의 악취, 세비야 궁전의 오렌지 꽃향기, 더블린 도서관의 양피지 냄새, 지중해 작은 어시장의 생선 비린내. 그리하여 냄새는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여행의 즐거움을 완성한다.
---「프롤로그 칼리 사원」중에서
오향 냄새가 퍼지는 거리에 붉은색 한자 간판이 하나둘 나타나고 식당 창문 너머엔 구운 오리가 걸려 있다. 당신은 차이나타운에 들어선 것이다. 세계 어느 곳의 차이나타운을 가더라도 마주치는 냄새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알싸하고 달짝지근한 오향의 냄새다. 팔각, 회향, 정향, 계피, 그리고 산초의 분말을 섞은 오향은 중국 요리의 주재료다. 메뉴에 따라 이 향신료들의 혼합 비율은 조금씩 달라진다.
---「III 향과 나 구룡반도와 오향」중에서
구시가지의 어느 허름한 건물 입구, 안내인이 이름 모를 풀 한 움큼을 건넨다. 그의 손짓에 따라 풀을 코에 갖다 대자 달콤하고 상쾌한 민트 향이 스며든다. 계단을 오르자 곧 깨닫는다. 이 향기로운 환대의 이유가 실은 어마어마한 악취 때문이라는 것을. 3층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대한 벌집을 닮은 가죽 염색 작업장이 펼쳐진다. 가죽 더미가 담긴 웅덩이마다 각양각색의 염료를 풀어 놓았는데, 멀리서 보면 온갖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처럼 보인다.
---「I 향의 기원 모로코의 가죽」중에서
낡은 책 사이로 종이와 먼지 냄새가 스며 나온다. 목재의 향 속에서 잉크 냄새도 살짝 느껴진다. 오랜 시간과 생각들이 쌓여 있는 이 나지막하고 그윽한 향.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향으로 위로와 영감을 받았던가? 책 냄새.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골목, 오래된 박물관이 연상되는 이 냄새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이 특유의 냄새를 ‘우디(Woody) 향’, ‘흙 냄새’ 등으로 표현한다. 비 내리는 숲속 나무 향에 비하면 좀 더 묵직한 느낌이다.
---「II 향의 진화 더블린의 도서관」중에서
복잡한 구시가지 입구에 한 고풍스러운 차 상점이 눈에 띈다. 입구에서부터 진한 향이 풍긴다. 3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는 가게의 주인은 친근하고 능숙하다. 발효 향이 강한 아삼(Assam) 차, 은은한 다즐링(Darjeeling) 차, 매혹적인 재스민 차, 마살라 향이 넘치는 차이 외에도 수많은 향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인도 아삼 지방에서 재배되는 차나무는 열대 종으로 강한 향이 특징이다. 영국에서 아침에 주로 마시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도 아삼 차를 기본으로 한 혼합 차(Blended Tea)다. 차이 또한 아삼 찻잎에 우유와 설탕, 정향, 생강, 후추 등을 섞어 끓인 차다. 무더운 인도 날씨에 적합한 깊고 강렬한 맛이다.
---「III 향과 나 라자스탄의 상인」중에서
멀리 거대한 은빛 덩어리가 꿈틀거린다. 바닷속 15m, 오후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정어리 떼는 타원형에서 갑자기 기이한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꾼다. 돌연 사라지더니 내 왼쪽에 다시 나타난다. 유령이 춤추듯 그 비현실적 모습에 나는 완전히 빨려들고 만다. 절벽에 붙은 산호가 맹렬히 빛을 뿜어내고 내가 뱉는 물방울 소리가 신비하게 울린다. 헐떡거리다 문득 낯선 냄새를 느낀다. 정어리 냄새? 하지만 내 코는 어깨에 멘 공기통에 연결돼 있으니 이는 후각적 연상이나 환상에 가깝다. 사람들은 강렬한 자극이나 충격, 각종 약물의 영향이나 질병 상태에서 감각의 왜곡을 경험한다. 임산부의 후각 변화는 잘 알려진 예다.
---「III. 향과 나 후각과 환상」중에서
유럽풍 거리 위로 어른거리는 모스크의 둥근 지붕과 첨탑들은 이 도시 고유의 실루엣을 완성한다. 해변 카페 위로 연기가 피어올라 다가가니 이곳 거리 음식인 고등어 샌드위치를 파는 행상이다. 고등어를 손질해 숯불 위 그릴에 굽는데, 익숙한 냄새다. 보스포루스 해변의 고등어 굽는 냄새를 맡으며 나는 오래전 고향 생각을 한다. 어두워지는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사이로 생선 굽는 냄새가 흘러나올 때면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I. 향의 기원 고등어 샌드위치」중에서
오랜 기간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많은 사진과 기록이 남았지만 가장 생생한 것은 여행지의 독특한 냄새와, 그 냄새에 얽힌 감성적 기억이었다. 지구촌 곳곳의 삶이 고유의 냄새들을 만들어 가는 풍경, 그리고 그 냄새들이 그 지역을 특징지어 가는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냄새와 후각이 선사하는 그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적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