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는 아픔. 무언가가 찢어지면서 나오는 것, 그것이 생명입니다. 흙이 갈라지고 새싹이 돋아납니다. 나무껍질이 갈라지고 연한 가지가 나옵니다. 동지를 가르고 새날이 다가옵니다. 그렇게 살이 갈라지고 갓난아기가 태어납니 다. 역사의 살이 찢어지고 갈라져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합니다. … 칼의 흔적, 상처 자국은 곧 생명의 표시입니다. 그때 본 마리아의 검은 얼굴에 난 칼자국은 바로 이런 생명의 자국이었습니다.
--- 「마리아의 얼굴」 중에서
우리의 껍질 때문에 쉽게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껍질이고 질그릇이고 포장이라 하지 않습니까. 겉사람은 낡고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은 깨지고 포장은 찢길 것입니다. 누가 늙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알맹이입니다. 우리의 낙심이 그 알맹이 때문이라면 좋습니다. 얼마든지 고민하고 절망하고 낙심도 하자고요. 우리의 그 껍질이 다하기 전에.
--- 「교회의 껍질과 알맹이」 중에서
경외심은 단순한 공포심과는 다릅니다. 공포가 불안한 심리에서 비롯된 병적 현상이라면, 경외는 건강하고 바른 사람의 겸손한 태도며 진실한 고백입니다. …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신앙이 아니듯,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또한 참 신앙일 수 없습니다. … 하늘을 두려워하는 학자, 하늘을 두려워하는 장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회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인, 그리고 이러한 사람을 존중하고 아낄 줄 아는 사회. 늘 하늘을 우러르며 살았던, 그런 시인이 살아있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 「경외심」 중에서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랑의 역할을 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고랑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밭은 이랑이 있어 밭입니다. 이랑에다 씨를 심으면 그 이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름도 거기다 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일 밭에 고랑이 없다면 어떨까요? 이랑과 고랑의 구별이 없는 밭을 한번 생각해봅니다. 농부가 쟁기로 밭갈이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고랑을 파는 것 아니겠습니까? 밭이랑은 이미 주어진 것이니까요.
사람이든 단체든 이러한 양면은 꼭 필요하겠지요. 다만 어느 것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랑보다는 고랑의 역할이 아닐까요. 좀 더 낮은 자리였으면 좋겠고, 좀 더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좀 더 겸손했으면 좋겠습니다. 곧 이랑이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고랑의 길이지요. ‘제일’이나 ‘중앙’보다 ‘밭고랑 교회’라는 이름이 하나둘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을 영력(spiritual power)과 구별 짓고 싶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밭고랑」 중에서
관용과 포용의 ‘용容’은 ‘용서’의 그 ‘용’입니다. 관용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너그러움이라면 포용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싸안음입니다. 이점에서는 프랑스어도 도움이 되는데, 관용은 잘 알려진 ‘똘레랑스tolerance’고 포용은 끌어안는다는 뜻의 ‘앙브라쎄embrasser’입니다. 이를 제 나름대로 ‘관용적 사회’와 ‘포용적 인격’이라 표현하고 싶네요. 우리 사회에는 관용이, 그리고 우리 인간관계에는 포용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사회와 개인의 징검다리인 공동체에는 용서가 필요하겠지요. 사회-개인-공동체, 이 가운데 무엇을 앞에 두어도 좋겠으나 공동체에서 용서를 먼저 경험하게 되면서 개인은 포용적으로, 또 사회는 관용적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 「관용, 포용, 용서」 중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십자가를 만드는 일은 적지 않은 기쁨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가교架 橋’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이어지고, 나와 너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이면서 신약의 새 계명입니다. 이 둘은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하게 되며, 이웃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 이 전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주일 예배에 대한 여러 의견이 오갑니다. 어떤 경우라도 예배를 그칠 수 없다는 태도가 하나님 사랑의 표출이라면, 잠시 예배당 문을 닫아두겠다는 태도는 이웃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반쪽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이겠지요.
--- 「반쪽 사랑과 온전한 사랑」 중에서
영성은 신앙의 원형을 찾는 일이라고 봅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연이 원형이 되겠지요. 그러나 영성은 자연을 원형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원형이 되는 ‘그 무엇’이 무엇일까를 묻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 고, 귀에 들리고, 몸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배후에 있는 근원으로서의 원형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철학자는 형이상학(metaphysics)이나 이데아Idea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와 구원자인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따라서 영성은 원형과 복제, 그리고 변형變形의 과정을 거꾸로 추적해나가는 과정이지요. 곧, 여러 변형 가운데에서 원형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 「원형과 변형」 중에서
이데올로기의 종말, 역사의 종말은 이제 지구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여기서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666이나 144,000처럼 성경에서 종말을 암시하는 여러 개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표記標(signifiant)보다 기의記義(signifie)에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창고를 늘리고, 그 안에 먹거리를 가득 채우면서 종말을 떠들어대는 일은 이율배반이며, 일종의 정신질환입니다. 이른 아침 주님께 하루치 양식을 구하며 사는 삶이 진정한 종말론적 삶이 아닐까요?
--- 「시대적 화두」 중에서
그건 아직 다하지 않고 남아있는 생명 때문입니다. 슬픔이 다하고 아픔이 다하고 절망이 다해도 아직 다하지 않고 남아있는 생명 때문입니다. 왜 기도하는가? 그건 아직 다하지 않고 남아있는 죽음 때문입니다. 믿음이 다하고 소망이 다하고 사랑이 다해도, 아직 다하지 않고 남아있는 죽음 때문입니다. 왜 기도하는가? 그건 생명이 있고 그리고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 「왜 기도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