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 그만하고 새로운 인사법을 소개하겠습니다. 앞으로 국어 시간에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장이 일어서서 ‘차렷! 경례!’ 하는 군대식 구령을 집어치우고 이렇게 하기 바랍니다.”
반장의 구령을 집어치운다는 대목부터 학생들에게 또다시 충격을 준 것이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잘 말해주었다.
“새로운 인사를 하는데 반장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면 새로운 인사를 할 때, 종전처럼 군대식 구령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장의 구령에 따라서 인사를 할 것이 아니라 학생 각자가 자발적으로 하면 됩니다. 자발적으로 인사하는데 무슨 얼어 죽을 군대식 구령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국어 시간에 내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여러분은 각자 앉았든지 섰든지 간에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반갑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도 ‘반갑습니다’라고 답례를 하겠습니다. 이것이 수업 전에 하는 새로운 인사법입니다.”
듣는 자세 일등! 이것은 얼핏 보면 아주 별것 아닌 지극히 사소한 일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것이 만만치 않은 것이란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친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결론이 났다. 내가 명동 모임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태도에서 일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당장 도전해야 할 목표이다.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실력 없는 선생에게 엉터리로 배운 사람에게는 제대로 가르치기가 아주 힘이 들뿐 아니라 대부분 불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깨끗한 도화지에 개발새발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면 나중에는 그림을 지울 수도 없고, 또 그 위에 새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잘 그리게 가르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뭘 제대로 배우려면 어설프게 개발새발 그려오지 말고, 깨끗한 백지로 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합니까?”
그 엄혹한 시기에 유일하게 함석헌 선생님이 군부세력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장준하 선생이 만드는 「월간 사상계」에 “박정희 장군은 이제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요지의 핵폭탄급 글을 발표하였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서는 ‘군인은 본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민중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지만, 이를 대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가 이런 용기 있는 글을 실어줄 용기 있는 지면도 없었다.
“이처럼 대부분 사람은 자기 편리하게 보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며, 결국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합니다. 이런 바탕에는 얼추 자기 이익적 계산이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도둑이 보석을 훔칠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도둑처럼 판단하고, 도둑처럼 행동합니다. 도둑이 보석을 훔칠 때 사람이 보여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도둑은 보석을 훔치지 않았을 것이고, 도둑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보석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와 ‘보석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느냐’가 운명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도 보석상만 털지 않아 도둑이 아닐지 몰라도 사실은 도둑입니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보석상을 턴도둑보다 더 상습적인 교활하고 지능적인 도둑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 적이 다반사였다는 사실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보고 싶어 하던 것을 보는 순간, 내 눈에도 역시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 이야기를 굳이 여러분에게 한 것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력 없는 교사는 학교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합니다. 실력없는 교수나 교사를 방치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불량식품을 강제로 먹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를 이해합니까?”
“저는 총장님의 승용차 위로 올라간 적이 없고, 차 지붕 위를 걸은 적도 없습니다. 다만 평소에 제가 가던 대로 도서관을 향해서 직진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때 무슨 물체가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것이 총장님 승용차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 물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냥 평소처럼 직진했을 뿐입니다.”
총장의 승용차 위를 어느 학생이 걸어갔다는 사실은 즉각 총장에게 보고가 되었다. 총장도 너무나 놀라서 교직원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고 했다.
“총장님, 그놈을 붙잡았습니다.”
“그래? 왜 남의 차 위를 걸어갔다는 거야?”
“하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을 우리 가족들이 다 반대를 합니다. 아니 가족들이 아니라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를 합니다.”
나는 내가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급소를 찔린 것 같았다. 나는 충격을 감추고 너스레를 떨면서 한마디했다.
“그거야 각자의 자유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의 부모님께서 저를 반대할만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것을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러자 그녀는 잠시 주저하였다. 그럴수록 반대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아무 실수도 하지 않았다. 가령 임신을 시킨 것도 아니고, 임신은커녕 손목조차도 잡아보지 않은 사이인데, 왜 그녀의 부모님이 나를 반대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마침내 그녀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하륜 선생님을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 「1권」 중에서
“그렇습니다. 설교할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을 말하면, 설교나 일상적인 말뿐 아니라 삶 전체가 이 책 저 책에서 긁어와서 짜깁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땀과 눈물이 스며 있는 ‘자기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이 배운 인간일수록 주체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이 책 저 책에서 베낀 짝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또라이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나요?”
나는 참 재수가 없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꼴이지만, 내 작품이 당선작이 아니라 하다못해 가작으로 뽑혔더라도 문단에 등단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기고만장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나는 꼬랑지를 완전 내리고 말았다. 기가 죽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최선책이 신춘문예라면 차선책은 신인추천이다. 나는 문단에 선이 닿을 인연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다.
그가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엉터리 약장수가 만병통치약(?)을 선전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요즘 엉터리 약장수 같은 유명인사가 한둘이 아니고, 그들의 엉터리 만병통치약 선전을 곧이듣는 순진한 사람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제법 알려진 가톨릭 신부였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그가 아무리 유명 인사라 해도, 신부라는 직업의 특성상 아무래도 행복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신부는 한마디로 ‘야생 사자’가 아니라 ‘동물원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순간 초등학교의 운동장 조회가 생각났다. 매주 월요일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 조회를 했다. 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이 훈화를 했는데, 학생들은 처음 한두 마디 정도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나중에는 다들 듣지 않았고, 옆의 동무와 장난을 치거나 발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딴전을 피웠다. 그래도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끝이 없었다. 훈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듣는 학생들은 줄었고, 마침내는 전교생 중에 듣는 애가 몇 명 될까 말까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교장선생님이 너무 딱해 보였다. 왜 아무도 듣지도 않는 이야기를 계속할까? 나중에는 이런 교장선생님이 딱하다 못해 바보같아 보였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지금 당장 누구를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당장 갚아야 할 빚은 없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 빚이 물질적이든, 마음의 빚이든 상관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너무 부질없는 것에 너무 아등바등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눈과 귀가 멀지 않았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지금 정말 부질없는 것을 갖기 위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다 쓰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지금 가려운 다리를 긁는 게 아닌 엉뚱한 다리를 긁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반성, 내지는 자기 검정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내가 시집을 내는 것은 나와 여러분과의 약속입니다. 시는 고통이지만, 그런 고통을 통하여 값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음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시집을 내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시집을 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쓴 시를 한 데 묶는 의미도 있지만, 그런 소박한 의미 이상의 어떤 계기로 발전할 것같아 참 기쁩니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내 가슴에 꿈꾸고 있는 ‘사랑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뜻에 찬성하는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문이 더 있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에 많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앞으로 한산섬에서 펼쳐나갈 ‘사랑의 집’에 대한 그림을 함께 그리기도 하고, 상상만으로도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위한 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제 삶의 담보보다 열배 백배 천배나 많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앞서 말한 수표 끊는 논리대로라면, 이런 자들은 모조리 잡아 가두어야 한다. 갚을 능력을 넘어 수표를 끊어대는 것은 금융 질서를 파괴하고 마침내 경제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범죄이다. 이처럼 제분수에 넘치는 글과 말을 하는 자들도 이와 꼭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대가 한번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만약 다시 결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보다도 새로운 삶을 멋지고 소중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는 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실패를 거울삼아, 실패의 날들을 귀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삶을 살면,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대는 가시 면류관의 여왕이나 다름없습니다.”
문영진 군이 하얀 팻말을 방금 기념식수한 나무 앞에 박았다. 그러자 학생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마침 물 뜨러 갔던 학생이 들통에 떠온 물을 질질 흘리면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나는 들통을 받아들고는 방금 심은 나무 주변에 물을 주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또다시 환호하면서 박수를 보냈다.
“하륜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때 문영진 군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가 학교 운동장에 기념식수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제가 학생들을 대표해서 큰절을 올립니다.”
교무과 교무실에서 긴급 직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선생들이 다들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교장선생님이 크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선생님들이 평소에 애들을 어찌 가르쳤기에 오늘과 같은 불상사가 생긴단 말입니까!”
교장선생의 첫마디였다.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마치 이 말은 날 보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순하고 물러터진 학생들이 나에게 나쁜 영향을 받아서 오늘 너무나 엉뚱한 일을 벌일 만큼의 사나운 학생으로 변했다고 나무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도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교장선생은 오늘 스트라이크를 주동한 학생 대표들은 담임선생이 학생의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주문하였다. 또 경찰서에 부탁하여 통행금지가 지나더라도 아무 문제도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하였다.
--- 「2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