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소비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술은 작품을 소비하면서 작품의 의미까지 사유하게 하며, 사유의 과정을 통해 소비자를 윤리적 판단에 이르게 한다. (…) 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 p.17~18
섹스와 술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값싼 사치이자 가장 비용을 적게 들여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하지만 가난 탓에 미소는 섹스도 잃어버렸다. 이제 미소에게 남은 것은 술뿐. 그녀는 필사적으로 위스키라는 자신의 취향을 지킨다. 그녀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편안히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맛을 보는 위스키 한 잔이 그녀의 행복이자, 꼭 지켜야만 할 존엄이자, 그녀의 실존을 증거하는 알리바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가난은 추상이 아니다. 가난은 소공녀가 보여주듯 삶의 가장 디테일한 부분까지 옭아맨다.
--- p.39~40
약자의 언어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차별적 관계가 끝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라도 약자의 언어는 강자의 행위를 고발하는 언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그렇다. 일본이 ‘위안부’라는 단어를 부정하고 역사에서 지워버린다면 피해 사실도 사라져버린다. 인권을 유린당한 식민지 여성이라는 정체성,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반인륜 범죄 피해자라는 입장도 함께 부정되고 지워져버린다. 이것이 일본이 그토록 ‘위안부’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이고, 언어가 가진 영향력이자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 p.70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밀레의 농촌 풍속화에서 그런 것들을 읽어내도록 학습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의 소박함, 곡식을 준 땅에 가지는 경건함, 하루 일을 끝낸 농부의 평온함 같은 것을 느끼도록 학습되었지, 가난에 찌든 농부의 절망을 읽어내도록 학습되지는 않았다. 밀레의 의도야 어쨌든, 우리는 그가 그린 노을에 물드는 농부들의 풍성하고 감상적인 실루엣에서 실제 농부들이 겪을 수 있는 삶의 고통은 읽어내지 못한다.
--- p.87
베이커나 홀리데이의 전기, 피츠제럴드의 자전 에세이를 읽어보면, 어디에도 독자의 판단으로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재단선, 삶의 기준선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한평생이란, 그저 그 사람이 걸어온 짧고 긴 시간의 궤적일 뿐이다. 거기엔 성공도 실패도 없다. 술과 마약에 빠져 살았다고 마냥 비난만 할 일도 아니다. 술과 마약이 있어서 그나마 노래를 하고 트럼펫을 불고 소설을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인생에 그마저도 없었다면 베이커나 홀리데이, 피츠제럴드의 인생은 더 비참하고 더 짧았을 수도 있다.
--- p.146
예술이란 매우 긴 시간이 투자되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다. 소설 장르를 봐도, 보통의 지망생이 소설가로 등단을 해서 첫 책을 내고 당당히 자기 세계를 구축할 때까지 십 년, 이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 십 년, 이십 년 후를 바라보며, 지망생은 매일 시간을 내서 습작을 하고 열심히 책을 읽는다. 그러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는 같은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당장의 효과를 바라고 읽는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 분야의 책과는 달리, 소설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고양하기 위해 읽는 책들은 딱히 어디 써먹을 데도 없다. 언젠가 읽은 예술이나 철학 서적들이 쓸모가 있게 되는 때는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다.
--- p.171~172
링에 올라 경기를 하면 심장 발작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막아서는 연인에게 랜디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가슴이 찢기는 건 바로 저 (링 바깥의) 세상인걸.”
사람들은 랜디가 레슬링 때문에 삶을 망쳤다고 여기겠지만, 정작 그를 망쳐놓은 건 그를 냉대하고 조롱했던 현실의 삶이었다. 레슬링의 사각 링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지친 그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구원이었다. 관중석에서 그를 부르는 환호성이 들리자 그는 말한다. “들려? 저게 바로 내 세상이야.”
--- p.231
아감벤은 인간의 “생각 / 근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것은 오직 언어”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유는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우리는 추상회화를 읽어낼 수 없다. 우리는 그 대신 자신을,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언어를 읽어내고 사유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일을 즐긴다. 예술이 촉발하는 사유의 고통은, 그 예술의 이해되지 않는 아름다움처럼 때때로 충분히 즐길 만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무해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 p.24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