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짧은 생이지만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싶을 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인생은 왜 그렇게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아직도 청춘인 내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대부분 상실과 관련된 일이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떠나가고, 자책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던 날들…. 이번엔 무사히 지나간다 싶으면 예기치 않은 순간 나타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사건과 사고들이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이별, 새로 만들어지는 가정 환경, 사별, 빚, 가족들의 고단한 마음들,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치다 잃은 건강…. 이 책에서 내가 털어놓게 될 이야기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20대 청춘의 모습이자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쯤 되겠다.
--- p.6-7
엄마는 그저 일로서 남편 없는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나 역시 엄마가 일하러 나간 낮에는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의 부업과 집안일을 도왔다. 분리수거와 빨래, 청소, 밥하는 일을 하면서도 현관에 있는 센서등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날이 많았다. 오랫동안 불이 꺼져 있던 센서등은 그 아래를 지나는 무언가의 힘에 의해 갑자기 불이 켜진다. 희한하게 그런 센서등에 온통 내 마음을 빼앗겼던 기억이 난다. 우리 형편도 언젠가 저렇게 번쩍이는 순간이 오겠지 싶어서 그랬던 걸까. 할머니 집을 떠올리면 쥐와 함께 센서등이 내 머릿속에 켜진다.
--- p.20
스무 살쯤 되었을 때 엄마는 한 남자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친아빠와 헤어진 후 엄마에게 생긴 두 번째 남자이자 지금의 새아빠다. 말이 별로 없어 무뚝뚝했으며, 눈도 작아서 반드시 웃어야만 인상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아내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딸도 있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와 이런 여자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쓰러져가는 기둥이 서로 맞댄다고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당시 했었던 것 같다.
--- p.25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생길까 봐 경계하는 건 참 힘들다. 익숙해질수록 무거워지는 것들이 많다. 그저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나를 짓누르지 않게 하는 수밖에. 그래서 때로는 뭔가를 바꿔버렸다. 익숙했던 핸드폰을 바꾸며 연락처를 정리했다. 나와 결국 맺어지지 않은 ‘헌 관계들’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집이라는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났다. 기숙사와 자취라는 일상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익숙했던 것들이 곁에서 많이 사라졌다. 매주 앉던 교실의 그 자리, 매주 걷던 길, 자주 만나던 친구와 창가에서 보이던 익숙한 배경들….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렀던 익숙한 공간과 물건들을 버렸다.
--- p.54
목 어디쯤에 뭔가 걸려있었는데 그게 우울이었을까. 있는 힘껏 기침을 하거나 뭔가를 열심히 삼켜보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온몸을 죄어오고 답답할 때도 있었다. 남에게도 나에게도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던 것. 그건 드러내기 힘든 우울이라는 거. 일상의 한가운데서 슬픔과 우울감에 허우적거리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그런 병에 걸려버렸다. 가볍게 슬그머니 오던 것이 어느 순간 커다래지면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 p.63
자꾸만 내려앉는 감정,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는 이 감정.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처음에는 혼자 극복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날이 지날수록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이렇게 놔둘 수 없다는 절박한 생각이 들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뜯고 자꾸 무언가에 의지하려 했다. 혼자 발버둥 치다 결국 병원을 찾아갔다.
--- p.66
겪어보며 알았다. 우울한 것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기엔 미안하고 짐이 될 것 같아서. 온전히 내 잘못인 거 같아서. 가족이나 지인에게까지 그 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괜찮은 척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괜찮지 않았던 것이고, 이것들이 점차 쌓여 사람을 한없이 벼랑 끝으로 내몬다. 우울증은 부정적인 생각과 잘못된 판단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이 내 마음을 할퀴고 결국에는 흉터를 새겨 놓게 된다.
--- p.72
삶은 반복되는 상처와 치유로 이루어진다. 행복과 불행이 실타래같이 얽혀 있는 인생에서 고통과 불운을 완전히 피할 순 없다.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은, 미래의 우리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친절한 신호등이라 생각하자. 또다시 엄마가 지겹게 하던 말이 떠오른다.
“착하게 좀 베풀며 살아라. 다 돌아온다.”
--- p.82
평범한 건 절대 없고 그렇게 사는 게 더 힘든 세상이 아닐까. 평범함이라는 끝없는 오르막을 쳐다보며 그 기준을 맞추다가 그렇게 끝나버리지는 않을까. 결국 삶은 그런 게 아닐까. 평범하게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어쩌면 지금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이 특별함일지 모른다.
--- p.86
늘 강해 보이고 한없이 커 보이던 엄마가 이제 작아 보인다. 엄마가 눈물을 보이는 날도 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식은 숨어서 울고 부모는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난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난 후에는 눈물을 아끼곤 했다. 눈물로 인해 나 자신이 한없이 약해지는 것 같고, 그간 쌓여온 슬픔이라는 둑이 한순간에 무너질까 봐. 근데 그 둑이 한번 무너지면 감정은 한결 가벼워진다. 묵혀서 좋은 건 없었다. 모르는 척 감정을 감추는 것이 그저 강해지는 법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무너지면서 의연해질 테니까. 건강한 눈물이 우리 삶을 단단하게 채워갈 테니….
--- p.120
원래 그런 사람이란 없다. 환경과 사람이 누군가를 힘들게 했고, 누군가의 삶을 바꿔 놓을 뿐이다. 부딪히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또 사회였다. 새로운 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에는 모두 신입이다. 그런 사람을 위한 수많은 책과 조언이 있지만, 직접 살이 닿아 경험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게 더 많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후배님들에게 내 경험상 해주고 싶은 말이 있긴 있다. 그냥 발목 잡힐 만할 일은 만들지 말 것. 너무 많은 말은 삼갈 것. 나머지는 각자 경험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 p.126
마음에는 몸과 다르게 근육이 없다. 반복해서 겪는다고 마음 근육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 단 받아들이는 마음의 깊이는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 깊이만큼이나 덤덤하고 고요하게 반응하길 바란다. 우리 모두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러러면 스스로를 지킬 노력이 필요하다.
--- p.133
사람이 어려워 사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는데, 어느 순간 만만한 사람이 되어 버려 상처를 받는다. 또 어느 순간 상대가 선을 넘어와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 내 쪽에서 빨리 그 사람을 선 밖으로 밀쳐낸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특히 가까울수록 상처를 많이 받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적당히 신경 쓰면서 지내려고 하지만, 이것조차도 은근히 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처음 관계를 맺을 때 설렘보다는 두려움을 더 많이 갖는다. 길 바란다. 우리 모두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러러면 스스로를 지킬 노력이 필요하다.길 바란다.
--- p.163
생각해 보니 성공이나 취업처럼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거창한 사건 말고도 금세 행복해지는 게 많았다. 안부 인사, 공감 댓글, 숙면, 응원의 메시지…. 셀 수 없이 많은 행복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왜 자꾸 잊게 될까. 다양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우리 삶의 심심한 밑그림에 색깔을 채워 넣어보는 게 어떨까. 자기만의 취미랄까, 공상이랄까, 뻘짓 같은 것 말이다.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