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공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에 끝이 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음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종전의 복음보다 더 기쁘고 더 강력한 영원한 복음으로 승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집니다. 이 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영원 세계와 시공간 세계가 통합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시작되고 2,0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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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재림 때에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폭력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당하는 폭력도 의미가 없고, 성도들의 삶도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날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그 소망으로 우리는 폭력에 맞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면 안 된다는 ‘절대적 비폭력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하나님의 신적 폭력이 펼쳐질 것을 소망하며 폭력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일임하는 ‘종말론적 비폭력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라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고, 십자가의 승리도 이미 이루셨으며, 우리에게는 신적 폭력을 통한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되셨습니다.
--- p.51-52
기적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향한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그에게 닥친 기적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 이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으면 기적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기적보다는 우선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기적을 먼저 체험한 자는 기적에 매이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말씀을 먼저 맛본 사람은 기적 너머에 있는 송이꿀보다도 단 예수님의 말씀을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섯 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는 과정을 너무도 단순하게 기록한 것은 어쩌면 이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 p.65-66
하나님이 제7일째에 쉬라고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본성상 7일 주기로 휴식을 취할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7일 주기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도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 성수 명령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간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명령입니다. 쉼이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안식일 성수 명령보다 소중한 명령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바에 따라 지혜롭게 안식일을 성수해야겠습니다.
--- p.101-102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마음을 통해 생각들을 만들어 내는데, 우리의 마음에서는 선한 생각들뿐만 아니라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등과 같은 악한 생각들도 나옵니다. 우리를 종교적 및 도덕적으로 더럽히는 것들은 바로 그 악한 생각들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물을 먹었다고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악한 생각에 해당하고, 그러한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씻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배설물이 아니라 악한 생각과 같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악이 차지한 마음에서는 악한 생각과 행위들이 흘러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악이 틈탈 여지가 없도록 하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 p.144-145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예수 공동체를 구현해 나갑니다. 첫 번째, 예수 공동체는 아동 친화적입니다. 두 번째, 예수 공동체는 여성 친화적입니다. 세 번째, 예수 공동체는 사회적 약자 존중의 공동체입니다. 네 번째, 예수 공동체는 열린 공동체입니다. 다섯 번째, 예수 공동체는 탈권위주의적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의 지위에 따르는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 기대어 응석 부리는 제자들을 온전히 받아 주셨고, 대야에 물을 떠 와 쪼그리고 앉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정도로 평등한 인간관계를 즐기셨습니다.
--- p.178-179
예수님은 영원 세계인 하늘에서 시공간 세계인 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신 것은 우주의 왕으로서 사탄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켜 새 창조를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백성을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은 창조 본연의 성품을 잃은 인간과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였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면 그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게 되고, 그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므로 땅에는 여전히 악의 권세에 눌린 영역(사람과 지역)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영역의 통치권이 회복되기를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확장입니다.
--- p.252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탁월한 인격과 성품을 이루어 복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가져야 할 인격과 성품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땅끝까지 ‘예수님의 에우앙겔리온’을 전파하는 중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우리의 인격과 성품의 완성입니다. 세상을 위한 선을 행하다 낙심하여 믿음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탁월한 인격과 성품을 이루면, 우리는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복입니다.
--- p.282-282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법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도 이기적인 존재라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은커녕 다른 사람들조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받아 본 자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요일 4:19)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이웃)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천국 시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입니다.
--- p.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