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서신서의 ‘바울’은 로마서를 비롯한 다른 서신들의 ‘바울’만큼 진리를 가르치는 데 예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가르침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쾌하고 분명한 선언이 있다. 그 목표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5절에서 진정한 사랑, 선한 양심, 진실한 믿음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요약한 전반적인 생활 방식을 전해 주는 것이다
--- 「딤전 1:1-7 진리에 대한 참된 가르침」 중에서
바울 사도는 여자들을 훈련시켜 기독교를 점점 아르테미스 신앙 같은 종교, 곧 여자들이 선두에 서 있고 남자들은 그 뒤를 따르게 하는 그런 종교가 되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나는 그것이야말로 12절이 부인하는 내용 같다. 내가 “지시하다”로 번역한 단어는 흔치 않은 단어지만, ‘우두머리 행세를 하다’ 혹은 ‘장악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듯하다. 바울은 누가복음 10장에서의 예수님처럼, 여자들에게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공부하고 배울 공간과 자유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르테미스 신앙처럼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지휘권을 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배움과 가르침과 리더십에 관한 어떤 은사든 발견하게 하려는 것이다.
--- 「딤전 2:8-15 여자들의 배움을 허용해야 한다」 중에서
우리는 ‘영성’은 그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느낌이며, 그분의 사랑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이며, 일상생활의 여러 일 가운데서 초월적인 영역을 감지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기를 기대하며 바란다. 영성이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무엇이라는 말, 더욱이 운동선수들의 훈련이나 이사를 하기 위한 체력 훈련과 같이 열심히 해야 하는 무엇이라는 말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 「딤전 4:6-10 훈련을 받으십시오!」 중에서
현대 서구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의 발흥을 보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외적인 몸과 환경에 의해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숨겨진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참 생명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숨겨진 정체성에 맞추어 사는 데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려고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지금 우리를 불러 새 생명에 대한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은밀한 생명을 발견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분은 우리를 불러 ‘그런 것들을 버리고 우리의 생명을 찾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찾는 그 생명은 새로이 재창조된 하나님의 세상에서의 부활 생명일 것이다.
--- 「딤전 6:17-21 돈으로 할 일」 중에서
바울은 사회적·정치적 낙인과 위험에 직면하여 왕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중요한 도전에 관한 한, 어떤 회피 전략에도 맞서라고 디모데에게 경고한다. 디모데는 왕의 좋은 군사로서 자기 몫의 고난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처럼, 로마 제국에서 두드러진 이미지 하나를 끌어온다. 당신이 만약 로마 황제 치하에 있었다면, 로마 군인들이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그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물론 왕이신 예수의 군사들에게는 다른 사명이 있고, 전혀 다른 명령을 받는다. 실제로 두 군대의 차이 중 하나는, 황제의 군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반면, 예수님의 군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충성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황제의 군사들처럼 어떤 회피 전략도 세우지 않고, 지체 없이 그들의 주군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딤후 2:1-7 섬김의 조건」 중에서
성경이 기록되게 하시고,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성령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강력하시며, 또 그 능력은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삶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15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실 수 있다. 즉,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과 세상을 이해하도록 도우실 수 있다. 또 우리가 결국 타락으로 이어지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조받고 구원받았으며,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그분의 새로운 창조 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성경이 우리를 이끌어 가도록 하면, 이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 「딤후 3:10-17 성경에 머무십시오!」 중에서
바울의 복음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미쁘심, 신뢰성, 신실함이라는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진다. 이는 많은 신이 있으나 어떤 신도 신뢰할 만하지 않은 데 익숙했던 평범한 1세기 이교도들에게 아주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신들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 신이 있다는 것과, 언제 어느 때라도 신이나 여신들이 그들을 좋아하여 좋은 것을 베풀어 주거나, 혹은 그들을 싫어하여(아마도 제때에 적절한 장소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잊어버려서) 벌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들은 예측할 수 없고, 위험을 일으킬 수 있고, 악의적이기까지 했다. 초기 기독교 복음의 ‘좋은 소식’의 일부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온 세상에서 그 온 세상을 위해서 완전히 의지할 만한 하나님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었다.
--- 「딛 1:1-4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이런 조언은 매우 지루하고 구식으로 들릴 줄을 나는 안다. 아마도 오늘날 나오는 소설, 희곡, 영화의 절반은 규율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 소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가둔 사회적·문화적 감옥에서 탈피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것 같다. 분명 억압적인 구조가 있다. 분명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적절한 틀 안에 두는 진정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어디에서든 제멋대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소립자와 같은, 겉으로만 그럴듯한 자유가 있다. 참 자유는 결코 그저 무법 상태가 아니다. 저항자가 되는 일은 멋지고 때로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저항자가 되는 데서 그칠 수 없다. 그러면 결국 외롭게 고립되어 목적을 잃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조차 혁명에 성공하고 나면, 일상을 잘 꾸려 가기 위해 사회 구조를 다시 만들어야 함을 깨닫는다.
--- 「딛 2:1-10 가정을 향한 명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