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개그’를 안 좋은 버릇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아재개그’라는 말부터 중립적이지가 않다. 나는 이 책에서 아재개그가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습관임을 보여주려 한다. 가볍게만 보이기 쉬운 말장난의 배후에 숨은 의미와 가치를 들여다봄으로써, 평가절하된 말놀이의 위상을 찾아주자는 것이 내 의도다. --- 「머리말」중에서
나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누구에게나 아재개그 본능이 있다. 봉화로 귀촌해 살게 된 뒤로 동네 카페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몇 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운 여름날 카페에 모이면 주로 주문하는 것이 ‘아아’, 즉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더위가 살짝 누그러진 어느 날, 일행 하나가 주문을 하며 발길질하는 시늉을 한다. “난 찬 거.”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일행이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한다. “난 안 찬 거.” --- p.40
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나지 않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언어도 변한다. 언어를 변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말을 주물러대면 말은 변할 수밖에 없다. 말을 줄이고 늘이고 쪼개고 붙이고 비틀고 바꾸고 하는 행위는 ‘내가 바로 언어의 주인이다’ 하는 무언의 선언이다.
한편 말이 변한다는 것은 곧 사람살이가 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살이가 말을 변하게도 하지만, 말의 변화가 사람살이의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생각이 에너지다’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은 사람살이를 바꾸는 힘이다. 말놀이는 말을 생동하게 함으로써 우리 삶을 생동하게 한다. --- p.66~67
사람의 경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직접적인 체험, 읽기를 통한 경험, 듣기를 통한 경험이 그것이다. 이 셋은 실제 삶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경험의 총체를 만들어간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말놀이는 한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건너뜀으로써 성립한다. 두 가지 맥락이 이전에 없었던 방식을 통해 이어지는 순간 또 하나의 새로운 맥락이 생겨난다. 말놀이가 창조하는 이러한 맥락들은 어떤 식으로든 위의 세 가지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어린아이들이 말놀이에 취약한 것은 미숙한 언어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생 경험이 두텁지 못한 탓이다. 말장난이 삶의 다양한 국면에 대한 경험과 그에 대한 반추, 상상 등과 관련이 깊은 것만은 분명하다. ‘아재개그’는 있지만 ‘아이개그’는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 p.70
아이들은 레고 조각 몇십 개로 수백 가지 조립품을 만들어낸다. 서양음악은 7음계를 이용해 무수한 곡을 만들어낸다. 언어는 한정된 소리로 한정 없는 말을 만들어낸다. 한 낱말은 몇 가지 음운의 조합일 뿐이다. 언어가 나타내야 할 대상은 한없이 많은데, 음운 조합이 나타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말로 나타내야 할 것은 무한하고 말을 이루는 소리는 유한하다는 사실, 바로 이 점이 소리가 같거나 비슷한 말들을 양산하는 원천적 조건이자 소리를 이용한 말장난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배경이다. --- p.95
‘머리카락 보일라’ 술래잡기 놀이의 한 장면이 아니다. 내가 오래전에 만들어둔 초소형 보일러 네이밍이다. 두 낱말의 소리가 동일한가 유사한가 하는 차이는 말놀이꾼들에게 그리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만, 비슷한 소리를 이용한 말놀이가 같은 소리를 이용한 경우보다는 과감함을 좀더 요구한다는 점에서 따로 모아보았다. ‘슬프다’의 활용형인 ‘슬퍼’를 ‘술 퍼’로 변형한 항간의 말장난이 이런 놀이의 예다. 소리에 민감한 말놀이꾼이라면 일본의 전통 2행시인 ‘하이쿠’에서 ‘아이쿠’ 하는 감탄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퇴마를 주제로 한 테마 마을’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116
‘이쑤시개’는 심하게 이상한 말이다. 딱딱한 이를 어떻게 쑤신단 말인가. ‘잇사이틈새후벼파개’가 사실에 부합하는 정확한 이름이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이’보다 ‘이빨’이 대세이니 이들에게는 ‘이빨사이틈새후벼파개’가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 p.147
낱말 쪼개기는 소리에 주목하는 말놀이 방식에 비해 훨씬 더 극적이다. 소리를 이용한 말놀이가 한 낱말에서 다른 낱말로 건너뛰는 데 비해, 낱말 쪼개기에서는 낱말이 해체되면서 다른 낱말들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미자’가 ‘이미 자’가 되고 ‘나가는 곳’이 ‘나 가는 곳’이 되는 식으로 전혀 엉뚱한 상상력이 뛰노는 과정에서 애초의 의미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군사훈련으로 치면 원래의 대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헤쳐모여’다.
한 음절 단어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쪼개지 못할 말은 없다. 문제는 쪼개서 무엇을 만들어내느냐다. 어떤 낱말이든 일단 쪼개놓고 보면 뭔가 보이는 게 생긴다. 예컨대 ‘외모’는 ‘왜? 뭐?’로 쪼갤 수 있고, ‘아재개그’는 ‘아, 쟤 개그?’로 분해할 수 있다. --- p.150
말놀이는 인간의 언어행위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것의 하나다. 이러한 말놀이를 업으로 삼는 두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개그맨이요 다른 하나는 시인이다. 시인들은 언어라는 산의 마루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시인들이 들으면 낯간지러워하겠지만, 나는 ‘시인’을 줄여 ‘신’이라 부른다. 그들은 언어 세계의 신들이다. --- p.177
‘권력형 아재개그’는 유죄다. 이것의 다른 이름인 ‘불편한 아재개그’도 당연히 유죄다. 하지만 ‘아재개그’ 자체는 죄가 없다. ‘썰렁한 아재개그’도 죄는 없다. 단, 주변의 비난과 무시를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런 것이 싫다면 아재개그를 따끈따끈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말장난을 뜨끈하게 데우느냐,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 p.201
아재개그가 제대로 먹혔는지는 상대의 반응으로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아재개그를 당한 사람은 곧바로 멍한 상태가 된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릴 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다. 이런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꾸준히 내공을 쌓아야 하는데, 그 비법을 아래에 공개한다. --- p.202
말놀이의 본질은 남을 웃기는 게 아니라 내가 웃는 것이다. ‘혼자 웃기’는 실성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말놀이꾼들은 남을 웃기기 전에 혼자서 먼저 웃는다. 사람들이 남을 웃기고자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웃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남의 몸을 씻기는 손은 저절로 깨끗해진다. 남을
웃게 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웃게 된다.
말놀이는 나와 남을 동시에 즐겁게 한다. 웃음은 ‘긍정적 자기확인’의 발로다. 두 글자로 줄이면 ‘행복’이다. 인생의 정체, 본질, 목적이 뭔지는 누구라도 알기 어렵지만, 웃음 넘치는 일상이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다.
---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