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알려진 순간 이후,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뭐야, 말해도 별일 안 일어나네! 이럴 거면 괜히 숨기지 말고 좀 편하게 얘기할걸.’ 괜스레 마음 졸이며 숨긴 것이 조금 아깝게 느껴진다. 주변 사람들도 솔직함 뒤에 편안한 웃음을 지으면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엔 고급 스킬이 필요하긴 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스킬이. 그렇게 나는 드디어 상처를 농담으로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내가 농담처럼 심각한 얘기를 할 때의 당혹스러움을 조금 즐길 정도로.
농담으로 내 상처를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상처가 더는 상처가 아님을 느낀다. 여전히 나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으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솔직했으면 싶기도 하다. 그럼 우리는 서로 불행 배틀을 하면서도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겠지. “내가 더 힘들었어!”, “아냐, 내가 더 힘들었지~!” 내 주변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 「상처를 대하는 자세」 중에서
아버지 가까이로 걸어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버지를 무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살았다’는 말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지만, 죽다 살아난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은 무엇일까. 연락도 없다 덜컥 ‘죽음’이라는 것으로 자식들을 부른 아버지에게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 걸까. 넓게 퍼진 원망이 다시 살아버린 아버지를 향했다.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도 나를 보았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 사이로 간신히 말을 했다.
“우리 딸, 보고 싶었어.”
그 한마디에 원망이 으스러졌다. 용서하지 못할 죽은 이는 없다. 겨우 숨을 쉬는 아버지 곁에서 나는 ‘죽은 이가 될 이 또한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느꼈다. 지금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새로운 마음도 가질 수 없다. 삶은 모두 원망이 되고 죽음은 후회가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복잡함은 흘러가고 안도의 웃음이 났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는 이이기에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 「죽지 않았다면, 늦지 않았다」 중에서
평소 자잘한 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나의 마음은 늘 피곤하다. 건강한 고양이가 아플까 봐 걱정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에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일일이 생각한다. 글은 또 어떻게 쓸지 매일 고민하고, 평소 습관처럼 삶이나 죽음, 감정이 무엇인지 사색에 잠긴다.
그런 나는 지치지 않기 위해 마음 아끼기를 한다. 걱정이 끊임없이 들면 뚝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 일에 별다른 관심도, 신경도 안 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대충 적당히 물건 사기다. 알아보고 사면 돈을 조금이나마 아낄 수 있을지 몰라도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드는 나의 온 신경과 생각과 마음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알아보는 시간이 꽤 길다. 한 시간에서 며칠, 몇 달을 알아보기도 한다. ‘미리 샀다면 고민한 시간 동안 그 물건을 쓸 수 있었을 텐데! 물건 알아보는 시간과 노력을 아꼈을 텐데!’ 보통 비슷한 물건을 찾아 가격 비교를 해 봐도 많이 차이 나봤자 만 원 정도다. 그렇다면 나는 만 원을 쓰고 내 시간과 노력을 사겠다! 그런 것이다!
--- 「만 원짜리 마음 중에서」 중에서
글을 쓰다 보니 ‘잊혀진 원고의 섬’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되지 못한 잊혀진 원고들이 모이는 섬인데, 실수로 지워진 원고들 역시 이곳으로 모이는 상상을 했다. 그곳엔 분명 내가 실수로 날려 먹은 원고지 200매 분량의 원고와 아직 출판될 기미가 없는 내 원고가 ‘날 잊은 거야?’라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겠지. 으윽. 마음이 아프다.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다고.
(...)
잊혀진 원고의 섬에 불필요한 원고는 없다. 비록 실수로 날려 먹어 흔적도 안 남은 원고라 해도 내 안에 저장하는 습관을 남겼다. 잊혀진 원고의 섬으로 향한, 아주 처참하게 망한 내 첫 서평도 기세등등하게 “내 덕분에 너희도 쓴 거라고!” 하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망한 글이었지만, 첫 서평이 있었기에 다른 글을 쓸 수 있었으니까.
지금쯤 아마 수많은 원고가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있겠지. 내 원고는 나를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요즘 좀 게으르지 않아? 정신 좀 차려야 하는데.”, “심심하다. 새로운 글 안 들어오나?” 하며 수다를 떨고 있지는 않을까. 그곳으로 새롭게 향하는 원고들은 무얼 가지고 향하고 있을까.
--- 「잊혀진 원고가 모이는 섬」 중에서
나는 지금 여기서도 은근 무심한 위로를 하고 있다. 진심으로 쓰고 있는데 거기까지다. 내 경험을 얘기해주면서도 “나는 그런데, 너는 아닐 수도 있지.”라는 어투를 꼭 섞는다. 그럼 상대는 스스로 위로받을 거리를 찾아낸다. 어디서든 마음 닿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고 자신의 마음에서 위로를 만들어낸다.
그런 걸 보면 위로는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속에서 위로를 찾게 조금만 도와주면 사람은 자신만의 위로를 찾아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위로라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진심으로 듣고 나로서 얘기하기만 하면 나머지 위로는 위로를 바라는 상대가 어디서든 찾아낼 테니까. 따듯한 위로를 원한다면, 조금 더 따듯하게 들어주겠다.
--- 「딱히 위로를 하려던 건 아닌데」 중에서
이 책에는 나를 향한 많은 오해와 진실이 담겨 있다. 정신질환자, 작가, 유부녀, 철없는 자식, 이상한 친구, 자퇴생, 자살 시도 생존자, 한부모가정 자녀.
당신의 주변에 있을법한 사람이기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나 싶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읽지 않고 몇몇 키워드만 보았다면 당신도 나를 오해할지도 모르고 미워할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죽음이라는 둥, 결혼할 가치가 없다는 둥. 그런데도 나는 숨기지 않는다. 더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올수록 당신과 나, 우리와 같은 곳에 놓인 이들의 미움은 줄어들 테니까.
여전히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글을 사이에 두고 이해 혹은 미움 사이에 놓인 당신이, 나와 같은 이의 앞에 마주 앉아서 진심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그때도 당신은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하게 살아갈, 혹은 나의 파편 같은 이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들이 조금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서로 공감한다면, 충분히 내 몫을 해낸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그런 나의 마음이다.
나는 반드시 ‘살아야지’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눈을 맞춘다면 살며시 웃어 보일 것이다.
함께 미움을 덜어나갈, 고마운 당신을 위해.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