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목회서신 전반에 걸친 바울의 우선적 관심사는 진리, 곧 진리가 충실하게 지켜지며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다. 20세기가 거의 끝나 가는 오늘날에도 이 주제가 적절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대 문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에 압도되고 그 속에 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서문」중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를 속히 보리라 기대했으며, 그렇게 되면 당연히 사도로서 교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이 지침을 써 보냄으로써 자신이 없는 동안 교회의 삶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알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디모데 개인에게 보냈지만, 사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공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것으로서, 바울은 서신 전반에 걸쳐 디모데를 넘어서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디모데전서 서론」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같은 철저한 주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이시며,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또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진리는 중요한 문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짓 교사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사도들 역시 같은 것을 가르쳤다.
---「1장 사도적 교리」중에서
지금까지 나는 우리가 성경의 계시 안에 나타난 문화적 요소들에 관련된 두 가지 극단적 입장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들을 ‘문자주의’(둘 다 떠받드는)와 ‘자유주의’(둘 다 거부하는)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제 세 번째이자 중간인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문화적 조바꿈’이라고 불린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적(변하지 않는) 계시와 그것의 문화적(변화하는) 표현을 구별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우리는 전자를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보존하고, 후자를 현대적 문화 용어로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2장 공적 예배」중에서
여기에 진리에 대한 교회의 이중적 책임이 있다. 첫째, 교회는 진리의 터로서 진리를 튼튼하게 받쳐 줌으로써 그것이 거짓 가르침의 무게로 인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진리의 기둥으로서 그것을 높이 쳐들어 진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해야 한다. 진리를 굳게 붙드는 것은 복음을 변호하고 확정하는 것이다. 진리를 높이 쳐드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두 가지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3장 목회적 지도 체제」중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쓰신 책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경건해지지 않으면서 이 경건한 책과 친숙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4장 지역 교회의 지도자」중에서
따라서 디모데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빙산의 원리, 곧 사람의 십분의 구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는 사람들의 품성을 정확히 살펴보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야 한다.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장점을 숨기고 있듯이 매력적인 사람들은 종종 약점을 숨기고 있다. 디모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표면과 깊이, 겉에 드러난 것과 실제가 어떻게 다른지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5장 사회적 책임」중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상대주의 시대에 진리와 선 그리고 생명을 절대적 목표로 놓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들은 건강한 균형을 이룬다. 어떤 이들은 진리를 위해 싸우지만 거룩함을 무시한다. 다른 이들은 거룩함을 추구하지만 그에 견줄 만한 진리를 향한 열정이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종교적 경험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것들을 외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 셋을 결합시킨다.
---「6장 물질적 소유」중에서
신약성경에서 디도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이방인 회심자들이 세례와 더불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과 관련되어 나온다. 바울과 바나바가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왔을 때, 유대주의자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바울에게 압력을 가했던 것이 분명하다. 얼마 후에 바울은 자신의 선교 사역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는 달랐다. 이 경우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였으며 “복음의 진리”가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다고 바울은 쓴다. 바울은 디도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
---「디도서 서론」중에서
우리는 모든 가르침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그것의 근원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계시인가 아니면 전통인가? 둘째, 그것의 본질은 내적인가 아니면 외적인가? 영적인가 아니면 의식적인가? 셋째, 그것의 결과는 변화된 삶인가 아니면 단지 형식상의 신조인가? 참된 종교는 그 근원에 있어서 신적이며, 본질에 있어서 영적이며, 영향력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7장 교리와 교회에서의 의무」중에서
여기에 양자택일이 있다. 기독교 교리는 구원의 교리이며, 우리 구주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보석이다(10절).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그 보석을 변색시키든지 아니면 구원받은 자의 삶을 통해 구원의 훌륭한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 보석에 더욱 광택을 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복음을 장식할 수도 있고 불신을 초래할 수도 있다.
---「8장 교리와 가정에서의 의무」중에서
구원의 필요성은 우리의 죄와 죄책과 속박이며,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인자하심이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이며, 구원의 수단은 세례를 통해 보여지는 중생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구원의 목표는 우리의 궁극적인 상속물인 영생이며, 구원의 증거는 우리가 부지런히 행하는 선한 일이다.
---「9장 교리와 세상에서의 의무」중에서
서신의 말미에서 대서인이나 대필자로부터 펜을 옮겨 받아 개인적 안부를 쓰는 것은 사도 바울의 습관이었다. 그는 특별히 ‘은혜’라는 말이 포함된 메시지를 지금껏 써 왔는데, 여기에 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는 ‘은혜’를 언급했다(1:4).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났고(2:11), 우리는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3:7).
바울은 축도를 전하면서 디도를 넘어 그레데의 모든 교회, 더 나아가 우리를 포함한 후대의 모든 독자를 내다본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15절 하).
---「10장 마지막 인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