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동물은 생태적 가치, 경제적 가치, 문화적 가치 등 여러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존재 가치’다. 존재한다는 것, 우리 곁에 살아 숨 쉰다는 것, 인구 천만 대도시에 상위 포식자며 멸종위기 종 삵이 산다는 것 자체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어쩌면 그들의 존재는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자랑이며, 그들은 천만 시민과 함께 서울시의 자랑스러운 구성원이다. --- p.21
야생동물은 말이 없다. 조용히 도태되고, 조용히 희생되고, 조용히 사라져 갈 뿐이다. 서식 공간을 빼앗긴 야생동물에게는 실업급여도 긴급재난지원금도 없다. 어쩌면 야생동물을 공부하는 사람은 그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대변해 주는 것이 또 하나의 임무라는 생각이 든다. --- p.47
산에 눈이 쌓이면 동물 발자국이 여기저기에 찍힌다. 새하얀 눈은 동물의 생태 정보를 가르쳐 주는 숲의 화이트보드와 같다. 저마다 일타강사라 주장하는 각색 짐승들이 눈에 이런저런 흔적을 마구 남겨 동물 생태 및 행동학 특강을 펼친다. 눈 위에 남은 동물들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 p.133
이 땅에선 안타깝게도 지난 세기에 호랑이, 표범, 늑대와 같은 대형 식육목이 멸종했다. 최상위 포식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나라 산림생태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포식자의 부재로 고라니, 멧돼지와 같은 초식동물은 과도하게 번성하였고, 그 피해는 결국 사람에게 돌아왔다. 사람들은 포식자를 없애 버린 원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초식동물을 원망하고 탓하기에 바쁘다. 담비의 존재는 한반도 숲에 작은 희망 하나를 던져 준다. 담비는 대형 식육목이 사라진 산림생태계에서 초식동물의 천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개체군에 영향을 미치는 생태계 조절자가 아직 있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 p.157
도로를 건넌 담비 발자국은 숲에서 나와 망설이거나 주위를 살피는 기색 없이 곧장 도로로 뛰어들었다. 3마리로 구성된 무리가 함께 건넌 흔적에서는 앞장선 담비가 디뎌놓은 발자국을 따라 한 마리씩 차례대로 도로로 진입했다. 물론 이때도 좌고우면의 겨를 없이 도로로 직진했다. 도로 건너편 숲만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확률상 교통량이 많은 산림 관통도로에서는 그만큼 로드킬 위험이 클 수밖에 없다. --- p.168
행동권이 크고, 이동거리가 길며,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담비는 우리나라 산림 생태축 보전을 위한 우산종으로 적합하다. 우산종umbrella secies이란 생물보전을 위해 선정되는 종으로 우산종을 보호하면 그 서식 범위에 있는 다양한 종들의 서식지도 우산을 펼치듯 함께 보호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행동권이 큰 담비가 살 수 있는 숲은 다른 수많은 야생동물도 함께 품을 수 있는 중요한 서식지인 것이다. 담비가 사는 숲은 건강하다. --- p.214
운전자가 장애물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의 반응시간은 위험요소를 판단하는 시간 1.5초, 제동장치를 작동하는 시간 1.0초, 총 2.5초다. 도로변 수풀에서 뛰어나와 부딪힌 찰나의 순간, 시각 세포로 들어온 전기세포가 신경전달물질로 대뇌피질에 닿아 다리근육을 움직이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됐다. --- p.246
우리가 도로에서 볼수 있는 사체는 전체 로드킬 사고의 절반 정도 수준에 그친다(Bissonetteet al., 2000). 나머지는 충격에 의해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간다. 부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일단 도로 밖으로 피신하여 서식지로 돌아가 생을 마감한다. 결국 로드킬로 인한 야생동물의 희생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 p.246
우리나라의 도로 밀도는 1제곱킬로미터당 1킬로미터를 넘는다. 평균적으로 1킬로미터를 갈 때마다 하나 이상의 도로를 만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육상 포유동물 다수의 행동권은 1제곱킬로미터를 넘는다. 도로 사이사이에서 야생동물이 살아가며 먹이를 찾고, 새끼를 키우고, 독립하여 분산하고, 짝을 만나려면 인간의 길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 p.259
연구 개체 13마리 중 6마리가 무선 추적 도중에 로드킬로 산화한 셈이다. 호호 할미, 할비가 될 때까지 야생에서 천수를 누릴 수 있는 개체는 극히 드물다. 이 땅의 야생동물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호환, 마마, 전쟁이 아닌 자동차다. --- p.266
우리나라 전체에 고라니가 약 70만 마리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 해 동안 도로에서 희생되는 고라니가 약 6만 마리에 이른다는 조사(최태영, 2016)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라니 중 8퍼센트는 해마다 로드킬로 목숨을 잃는다. 인간 사회에 이 수치를 대입하면 우리나라 총인구가 5,100만 명이니 매년 400만 명이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다. 엄청난 재앙이다. 이처럼 로드킬은 종의 생존에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위협요소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멸종된 호랑이, 표범 등 최상위 포식자의 역할을 자동차가 하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268
매년 국정감사와 언론에서 제기되는 생태통로 효율성 문제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관리기관에서 모니터링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야생동물이 실제 이용해도 기록으로 남지 않는 것이다. 부실한 모니터링이 생태통로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주요 원인이었다. 따라서 생태통로 무용지물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효과가 적은 생태통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수의 생태통로는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279
도로 위 야생동물 죽음의 정확한 숫자는 삼척동자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주검의 운명은 납작하게 압축된 채 부패하거나, 다른 동물이 물고 가거나, 자동차와 부딪혀 도로 밖으로 튕겨 나가는 등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이런 불완전성의 명확한 한계에도 로드킬 발생의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293
허망한 죽음을 줄여 나가는 일은 인류 앞에 놓인 중요한 숙제다. 지구라는 조그만 별을 나눠 쓰는 운명 공동체로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현재는 인간 한 종으로 인해 다른 생물이 일방적으로 참고당하고 양보하기만 하는 상황이다. 인류의 지성과 지혜를 모아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 줄 때다. 그것이 야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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