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유구함”이란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순혈주의에 대한 착각, 신화적 상상력에 불과한 허구를 억지로 역사의 영역까지 끌어들여 5,000년이라는 긴 연원을 조작해낸 무지함의 산물일 뿐이다. 자원도 돈도 없이 맨주먹으로 건국한 나라에서 내세울 것은 ‘정신’이라는 관념적 에너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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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사 중심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띄우고, 「남」을 깎는 서술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피해 의식은 1920년대 이후 소멸해버린 무장 독립운동 투쟁에 대한 빈약한 전과를 부풀리고, 왜곡하는 걸 정당화하는 명분을 줬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3,000명을 사살하고,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독보적 존재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불변이며 신성하기 때문에 정말 사실일까 아무도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 이 신성불가침을 바탕으로 영화, 언론, 방송, 책,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한 왜곡이 자행되고 있을 때, 어느 한에서는 일제시대의 생활상이나 위안부에 대한 다른 이견을 냈다는 이유로 강단에서 멱살 잡힌 채 끌려 내려와 그대로 파직당하는 천박한 국가 수준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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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렇게 엉망진창이었는데, 고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말하기를, “고종은 등불을 환히 밝히고, 새벽까지 놀다가 새벽 4~7시경이 되면 비로소 잠을 자다가 오후 3~4시에 일어났다”라고 전합니다. 고종과 민비는 파티광이었는데, 허구한 날 새벽까지 파티를 열어 먹고 마시느라 소일했으며,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코자 내탕금을 늘이는 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매관매직도 모자라 나중에는 백동화 주조권까지 마구 팔아먹는 바람에 조선의 화폐 가치가 땅에 떨어져, 통화 질서가 극히 문란해지고 경제는 황폐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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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의 국고 탕진은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열강의 외교적인 지지를 받기 위해 각국 공관이나 실력자들에게 뿌린 예물과 돈은 엄청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세자에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의 질병이나 운세 등을 다스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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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부하들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약탈하고, 이를 추격하는 관군 토벌대와 교전한 것을 후대가 항일 의병 운동으로 격상하고 훈장까지 수여해가며 칭송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게릴라 전을 수행하기 위해 인근 부락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강압과 민폐는 불가피한 일이라 역설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본진을 털어본 적도 없고, 외교 시설이나 국가 기관을 습격한 적도 없는 사람의 과거를 미화하고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사당까지 지어가면서 신성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 나라는 제 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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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란은 초기에 지방 토호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무력 봉기한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위세가 전국으로 들불같이 번지기에 이르자,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대원군이 이들과 결탁하여 일종의 정변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동학란의 성격은 결코 혁명적이지도 않고 근대성을 갖추지도 않은 반란이었을 뿐인데, 오늘날 정치적인 이유로 이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장되고 미화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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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러시아 황제에게 전달한 이 친서, 즉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위원으로 하여 헤이그 평화회담에 파견한다”라는 뜻을 밝힌 서간에 찍힌 이 어새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즉,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이 친서는 위조된 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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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나 봉오동 전투와 같은 소규모 게릴라 전까지 팩트와 전과를 왜곡해가며 “크게 대승했다”라는 식으로 자화자찬하는 정신승리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청산리 대첩의 왜곡이 심합니다. 이 전투는 독립군 간의 의도적인 연합 작전도 아니고, 매복하여 섬멸 타격한 작전도 아니며, 일본군에게 대단한 피해를 준 적도 없는 허구의 소설입니다. 청산리 전투의 가장 큰 승리라고 알려진 어랑촌 전투의 사례를 보더라도, 우리 측 기록에는 적 연대장을 포함 300여 명을 사상시킨 대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일본군 하사관 1명과 병졸 2명이 전사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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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자원하기도 했고, 고려인 젊은이들에게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식의 참전 독려 기고문을 『레닌기치』에 투고하기도 했습니다. 1943년 그가 사망하자, 독립운동가라는 말 대신 조선 빨치산 운동의 거두, 레닌-스탈린당의 당원, 조국(소련)과 볼세비키당에 충직한 사람으로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기사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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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독립운동 사료들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요, 김상옥이 탈주하다 총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본 종로경찰서 쿠리다[栗田淸造] 경부 외 수 명을 사살했다고 되어있는데, 쿠리다 경부는 죽지 않고 다치기만 했으며, 그 이후로 경시로 승진해서 경찰서장에 훈장까지 받습니다. 왜 우리 역사가들은 툭하면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죠?
--- p.174
김구는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5월 22일 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신기언을 임시정부 건물 안에서 구타 폭행하고 임정에서 축출해버린 사건이나 해방 후 1946년 3월 12일 이승만과 언쟁을 벌이다가 본인을 테러리스트라한 데 격분하여 이승만을 쓰러뜨리고 어깨 위로 올라탄 사건을 보더라도, 김구는 부처의 미소를 띠는 온화한 초상과는 달리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p.191
2020년에 표도르 체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국민대 선임연구위원이 러시아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이던 옛 소련 외교 문서를 발굴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문서는 1968년 9월 북한을 방문한 드미트리 폴랸스키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 부의장과 김일성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1956년 한국 대선에 개입하였는데요, 당시 조봉암 후보는 북한에 도와달라 요청했고, 김일성은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진보당 설립과 조봉암의 정치 자금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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