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진 선생님의 연구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와 크게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일본 학자들은 12연기, 4성제, 8정도, 5온, 12처, 18계와 같은 개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고익진 선생님은 붓다의 깨달음이 어떤 구조와 체계로 우리에게 설해지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즉, 12처, 18계, 5온, 12연기 등은 낱낱의 개별적인 교설이 아니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불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며, 이후 근본불교 연구에서 한국불교의 특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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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용은 청색인가 황색인가’라는 말은 용이 실재해야 의미 있는 말이 된다. 그러나 용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즉 의(義)에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 말은 무의미하다. 붓다는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마치 ‘용은 청색인가, 황색인가’라는 문제처럼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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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아버지는 고혈압이고 어머니는 저혈압이라고 하자. 자이나교의 견해는 이 두 사람의 아들은 저혈압과 고혈압이 합해졌으므로 혈압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붓다는 이들의 아들은 고혈압과 저혈압이 동시에 있는 더욱 심각한 병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붓다는 사견을 종합하지 않고 버리도록 했다. 사견은 아무리 모여도 결코 정견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견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 허망한 사견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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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중생이나 세간, 영혼 등이 ‘인연의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유위’라는 말은 이들이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인연이 업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다시 ‘모든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연기(緣起)는 업보(業報)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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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가 이야기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은 존재하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고, 붓다가 이야기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으므로 잠시라도 지속하고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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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존재는 ‘인식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보이면 있다고 말하고, 들리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존재의 근원은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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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은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그 속에 어떤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불경에서는 ‘5온은 무아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 p.135
근본불교의 교리는, 12입처(十二入處)는 18계(十八界)로 발전하고, 18계는 5온(五蘊)로 발전하며, 5온은 12연기(十二緣起)로 발전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연기설은 12입처에서 시작되어 12연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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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어떤 것을 보고 느낌이 생기면 아름다움과 추함,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가 아름다운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더러운 오물을 보면 괴롭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미추와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본래부터 있다가 즐거운 것을 보면 즐겁게 느끼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부를 때 먹으면 괴롭다. 만약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한다면 맛있는 것은 언제 먹어도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는 맛없는 것을 먹어도 즐겁고, 배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괴롭다는 것은 감정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감정은 촉에서 생기는 것이지 본래부터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 p.191
우리가 생사의 세계에서 윤회하는 것은 식(識)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감으로써 ‘나’라고 하는 존재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식은 이렇게 생사윤회의 근본이다.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식이라는 존재가 죽지 않고 생사윤회를 거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를 오해하는 것은 이렇게 식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 p.199
육신(색수음)이란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중생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깨닫고 보니 물질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2입처라는 허망한 마음에서 생긴 무상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육신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육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육신은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 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法)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가 육신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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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라는 법칙은 연기하는 법과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연기하는 법, 그곳에 진여인 연기가 있다고 하듯이 연기하는 현상인 법과 그 현상이 있게 한 법칙인 연기의 법칙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는 붓다의 말씀과 같이 연기라는 법칙을 보게 되면 모든 현상이 그 법칙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현상에 연기라는 법칙이 있음을 알게 된다.
---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