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은 증시 호황에 최고 증권사에 입사해 기뻐하고 있을 즈음, 대우그룹은 붕괴의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세계 경영을 모토로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때 내가 다니던 회사는 채권형 금융상품을 잔뜩 팔았는데 그 안에 편입된 자산은 국채와 같은 안전자산이 아닌 대우그룹 아래의 계열사들이 발행한 CP나 회사채가 상당했다.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증권사 창구를 통해 금융상품을 조달해서 하루하루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자체 자금도 일명 ‘콜론’이라고 하는 하루짜리 대출을 해주었다. 매일매일 새롭게 실행되니 장기대출로 변질된 상태였다. 결국 대우그룹은 무너졌고 물레방아는 멈추어 버렸다. 콜론을
비롯해 직접 대출한 돈을 다 날렸고, 고객 돈도 상당한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 p.28
권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수, 검사, 판사 등등 희소성에 기반한 개별적 권위가 있고 집단적 의사결정 역시 부정하기 어려운 권위로 작동한다(붉은 신호등도 다 같이 건너면 죄의식을 사라지게 하는 법이다). 때론 미모도 같은 맥락으로 동원된다.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돌 뺨치는 미모를 지닌 탈북자는 종편 채널에 고정 패널로 출연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검사나 금감원을 사칭하는 전화 방식을 넘어서, 아예 검찰 로고가 벽면에 가득한 방을 만들어놓고 화상 전화로 의심을 없애는 형태로 진화했다. 수천억 원의 피해자를 양산한 사모펀드 사기 사건에도 전직 금융 관료, 전 검찰총장, 재벌 회장 등의 이름이 끝없이 등장하면서 불순한 의도를 덮는 신뢰의 페르소나로 작동된다. --- p.79~80
경쟁자가 아무도 없고, 매년 30%의 자기자본수익률(ROE)을 얻는 독점 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사실 독점을 다르게 표현하면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거하고, 가격 경쟁이 없다는 의미다. 외형만 보면 국가의 조세징수권과 같은 힘을 지닌다. 30% ROE에 국채의 할인율 1.5%로 계산하면 주가순자산비율 20배라고 표현한다. 국채에 투자하면 1.5%를 받는데, 국가와 비슷한 돈벌이 구조를 가진 기업이 30%의 수익을 돌려준다면 그 가치는 국채 대비 20배가 된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다. 속성에 대응하는 비례식에 다름 아니다. 증권거래소가 그 사례다. 각국의 증권거래소는 거의 독점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1개 또는 특화된 거래소(우리는 코스닥 시장)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증권거래소에는 없는 게 너무 많다. 경쟁자도 없고, 사업의 위험도 없다. 거래하면 나오는 수수료와 각종 거래 데이터를 가공해서 팔아먹는 수수료, 이 시장에 들어오기 위해서 상장 기업들이 내야 하는 IPO 수수료 등등 이곳에는 그 어떤 위험도 내재되어 있지 않다. --- p.120~121
복잡한 전술을 쓴다고 싸움에 이기는 게 아니듯, 많은 정보를 쥐여준다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건 아니다. 경마꾼들에게 정보의 양을 조금씩 늘려줬더니, 오히려 일정 수준에서 예측의 정확성이 떨어진 결과가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정보를 많이 접할수록 자신의 확신은 증가한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를 과신하게 될 뿐이지 올바른 예측과는 동떨어지게 된다.우리는 여전히 근대성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 더 높이 등등 산업화와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인풋과 아웃풋이 선형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선대의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이식받았다. 이는 좋은 결과의 필요조건은 정보의 양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많은 정보보다는 좋은 정보, 그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투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고는 금물이다. 모든 진실과 정의는 복잡하지 않다. --- p.136~137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성공 확률이 낮으니까 하지 마라”, “내가 해봐서 아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하지 마라” 등등 경험과 제법 그럴듯한 숫자에 의지하는 충고다. 이는 그저 개인적 경험과 단순한 통계를 미래에 입혀버리는 인습적인 말들이다. 실패를 자양분으로 삼지 않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소모한다면,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거나 알량한 권위를 가진 다른 꼰대들에게 판단을 의지하는 결과를 마주할 것이다. 즉 베이지안 추론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점은 확률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전확률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요인에 대한 적극적인 파악인 것이다. 어떤 요인에 신뢰를 높여가는 과정에서 투자에 성공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어떤 불확실성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된다. --- p.235
15세기 덴마크는 발트해에서 북해로 나가는 해협을 지나가기만 해도 돈을 받았다. 그 무렵 교역이 활발해지자 덴마크 왕은 발트해의 해협을 통과하려면 일단 항해를 멈추고 통행세를 내라고 했는데, 이를 거부하면 격침시켜 버리기까지 했다. 16세기에 들어서는 화물 가치의 1~2% 세금을 공식화하면서 그 규모가 3배 늘었고, 한때 세수의 30%에 달했다고 한다. 통행세는 1857년 코펜하겐협약을 통해 국제수로로 정해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물리적 독점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대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현금흐름에 근거한 인프라 투자와 같은 금융상품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국내 시장에 상장된 맥쿼리인프라는 배당주에 열광하는 투자자들의 위시 리스트 제일 위에 자리 잡는다. 머리 아프게 세입자 구하고, 유지 관리하면서 받는 변두리 상가 월세보다 훨씬 낫다. 주식의 핵심적 투자 포인트인 안정적 배당을 지탱하는 두 가지 요소, 국가 보증의 결합과 물리적 독점 모두에 해당한다. --- p.254~255
불확실한 삶의 예상 속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 없고, 과도한 기대만 앞세울 수도 없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단순한 것이 덜 틀리는 법이다. 현금흐름적 사고에 익숙해지면 합리적이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은 걱정은 큰 걱정을 해결하고 나서 생각할 문제다. 이처럼 긴 현금흐름을 추정하는 데 있어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는 가정들을 나에게 우호적으로 만드는 노력이야말로 삶의 안정감을 만들어내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노동소득을 유지하고, 필요한 소비를 하고, 투자소득을 합리적 수준에서 거둘 수 있는 노력을 하면 현재가치 기준의 부는 생각보다 적지 않다. 유산을 놓고 형제들끼리 으르렁거리는 현금 부자보다 더 단단한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해준다. 또는 기대보다 부족하다면 보완할 수 있는 노력을 어느 시점, 어느 부분에 투사해야 할지 알게 된다. 지향점이 있고 그것을 위해 꾸준히 수단을 고민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법이다.
--- p.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