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 이전에는 국왕이나 왕조의 상징이 국가를 상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합적으로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그 상징으로 세울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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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1875년에서 1883년 사이에 일련의 논의를 거쳐서 차츰 정립되어 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이를 통해서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당연할 수도 있으나 국기의 제정 과정이 바로 외교 관계의 수립 시기와 중첩된다는 점이다. 이는 국기가 새로운 외교 관계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을 정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 조선이 자의로건 타의에 의해서건 국기 제정 논의를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 당시 조선과 이해관계를 맺는 다양한 세력들이 그 표상 방식에도 저마다 참여하게 된다는 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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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얏꽃은 이전에 서화나 공예품 등에서 상징으로 등장한 적이 없으며, 문양화되어 표현된 적도 없다. 조선 시대에 상징으로 쓰인 가장 대표적인 꽃은 매화와 모란일 것이다. (…) 그러나 오얏꽃의 경우 회화의 소재로 채택된 적도 없을뿐더러 이러한 도안화가 이루어진 적도 없었다. 따라서 오얏꽃은 왕실의 성씨에서 착안하되, 그 도안화는 기존의 매화나 일본의 벚꽃 등의 도안을 응용하여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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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이 도안이 태극기를 주제로 했다는 점이다. 이 원도는 현존하는 태극기 자료 가운데에서도 매우 이른 편이며 현재의 태극기와도 매우 유사하다. 첫 우표에 태극기를 도안으로 채택하고자 했다는 것은 태극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의 상징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표가 발행되고 사용되었을 때 조선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보내진다면, ‘대조선국’의 문화적 독자성과 정치적 독립을 표상해 줄 중요한 매체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원도는 우정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던 우정총국에서 마련하여 일본에 보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도안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석연치 않은데, 어쩌면 우표의 제작을 일본에서 담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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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단은 기본적으로 제천단이지만, 이 시기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황제 즉위례를 거행한 곳으로서, 황제 즉위 기념물이 되었다. 원구단이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동양 유교정신의 마지막 보루라고 평가하는 연구도 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화이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원구단의 시대적 의미는 유교적 논리보다는, 서구 열강이 각축하던 시기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열강과의 동등한 지위를 주장하고자 했던 의지를 표현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원구단은 황제 즉위의 기념물(Monument)로서, 화이론적 세계관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만국공법적 세계관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고종과 대한제국의 의지를 국내외에 인식시키는 시각적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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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모습은 전통적으로 외부인에게는 노출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 왕이 참석한 행사를 그린 기록화에서도 군주의 자리는 용상이나 가마, 말 등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될 따름이었고, 군주의 초상인 어진(御眞)은 선원전(璿源殿) 등에 모셔 제향에 쓰이는 제의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대에 오면서 이러한 군주상은 크게 탈바꿈한다. 고종 초상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고종의 초상이 그 기능 면에서 전통적인 제의에 사용되는 것에서부터 개화를 이끄는 군주로서의 이미지로, 또 정치적으로 압박당하는 사태를 돌파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기에는 충군애국의 표상으로 변화해 나갔음을 밝혀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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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7월 16일 출발하여 일본에서 1개월여 머문 뒤 20일간의 항해를 통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견미사절단 일행을 『뉴욕 타임스』에서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문에 보도된 이들의 차림은 길이가 2~3인치는 되어 보이는 상투에 호박이 달린 망건, 그 위에 쓴 탕건과 갓부터 호기심을 끌었다. 갓을 쓴 차림새를 신문에서는 “퀘이커 교도가 쓰는 모자와 실크햇을 절충한 모자”라고 묘사했다. (…) 견미사절단 일행이 입고 있던 저고리와 통 넓은 바지, 그 위에 입은 마고자와 도포 또는 흰 비단 두루마기도 모두 보도의 대상이 됐다. 공식 행사 때에 입었던 사모관대는 청, 홍, 백, 흑색 등 색채가 다양한 비단옷이어서, 신문은 이들의 옷차림을 “환상적인 것”으로 보도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방문한 시카고에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역시 “아라비아 옷처럼 보이는 통바지, 무릎까지 내려온 두루마기, 식사를 할 때도 벗지 않는 모자(갓)” 등 이들의 차림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세세하게 보도했다.
--- p.274~276
훈장의 상징 문양들은 국가와 황실 관련의 주요 상징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는 훈장이 외교 관계로 수여하는 한편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이들에게 수여하는 명예의 표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훈장을 수여할 때 발급한 훈장 증서(勳章證書)에도 훈장의 상징 요소들이 들어 있다. 1902년에 프랑스 공사였던 콜렝 드 플랑시에게 하사한 훈1등 태극장의 훈장 증서 테두리는 오얏꽃 문양과 무궁화 문양을 번갈아 놓고 꽃가지로 둘렀는데, 네 귀퉁이에는 태극을 배치하였다. 한가운데에는 풍성한 꽃다발처럼 꽃가지와 꽃을 놓고, 아래쪽에는 금척을 삽입하였다.
--- p.329
왜 대한제국기에 국화(國花)로 제정되지 않은 무궁화가 국가와 민족의 상징으로 생각되었으며 왜 오얏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대한제국기에 무궁화가 국가의 상징과 관련되어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가를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 p.368
국표로서의 태극, 국문으로서의 오얏꽃, 국토의 표상으로서의 무궁화는 국기, 화폐, 우표, 훈장, 서구식 대례복 등에 활용되면서 대외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그 시각적 의미를 다져 나갔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 시기가 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양위당하여 순종이 황제에 오르게 되면서부터 국가로부터 제정한 국가 상징 문양의 의미는 점차 바뀌어갔다.
---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