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정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아이였다. 어렸을 적에 소설을 좀 끄적거리다가 재능의 한계로 포기한 후 딱히 꿈을 찾지 못한, 학교 성적 중위권에 수수하고 말썽 없는 여고생이었다.
많은 고등학생이 그러듯 김이정도 물리를 싫어했다. 관심 자체를 가져본 일이 없다고나 할까. 물리를 꼭 공부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이 자기 인생을 바꿔놓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당연히 눈곱만큼도 해보지 않았다.
거기에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고 누구한테나 사랑받는 꽃미남이 얽혀들 거라곤 더더욱.
꿈이나 꿔보았을까, 판타지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자기한테도 생길 거라고.
회귀?
빙의?
환생?
그런 건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피어난 스토리일 뿐이다. 시간을 뛰어넘든 차원을 뛰어넘든, 엄청난 먼치킨을 만나든.
하지만 김이정에게 닥친 일은 현실이고 과학이었다. 이정이 이해하건 못 하건.
그 남자애는 자기가 빛을 타고 왔노라고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내겐 너무 예쁜 당신
“그래, 나도 잘생긴 남자 좋아하긴 하는데.”
이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나치면 현실감이 없다고. 그냥 연예인인가, 만화 캐릭턴가 하는 거야. 너넨 안 그러냐? 방탄 멤버 누구랑 사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게 들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친구들이 이정을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딱 그래. 테일러랑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한 개도 안 좋단 말이지, 나는.”
대화의 발단은 친구들이 이정을 부러워한 것에서부터였다.
테일러 강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진 남학생이 전학 온 건 사흘 전, 그야말로 학교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미모에 다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어쩌다가 테일러 옆자리에 앉게 된 이정을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나 당사자인 이정은 소 닭 보듯 시큰둥했다.
“그래도 그러냐, 어디? 울 엄마가 그러던데, 칠십 먹은 할머니도 잘생긴 남자 앞에선 가슴이 뛴다고.”
얼굴 하얀 영주의 말에 이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니가 좋아하는 타입인데? 뭐, 어떤 여자나 좋아할 타입이긴 하다만.”
저만치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는 테일러를 보며 은주가 씨익 웃었다.
테일러 강은 키가 무지하게 컸고 그에 비해 골격은 살짝 가늘었다. 아직 덜 자랐다는 느낌에 무섭지 않은 덩치가 풋풋했다.
머리칼이 이마를 가리지 않았고 교복도 바지통을 손대지 않아 편안해 보였다. 그건 무척 마음에 든다고 이정은 생각했다. 유행 따라 남들과 똑같이 하고 다니는 남자애 같은 건 유치해서 질색이었으므로.
고개를 돌리던 테일러가 이정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던진 눈짓에 옆에 있던 여자애들이 이정 대신 자지러졌다. 잘생기긴 했네, 웅얼거렸더니 아이들이 부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2D 미남들만은 못해.”
허구에 깊이 빠져 있다 보면 현실이 눈에 차지 않는다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아무리 키 크고 잘생겨도 환상 속 인물만 할 순 없으므로. 이정이 최근에 읽은 작품 속 남주―조선시대 냉미남―에 한참 못 미쳤다, 테일러 강은, 최소한 김이정의 눈에는.
‘게다가 니들이 몰라 그러지 저 자식 완전 또라이라니깐.’
차마 친구들한테 털어놓지 못하고 이정은 속으로 꿍얼거렸다.
멀쩡하게 생긴 테일러는 사실 많이 이상한 놈이었으므로. 미친놈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만에 하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면 그거야말로 문제인데, 인간이 아니거나.
‘아무리 잘생겨도 극복이 안 되는 문제 아니냐고.’
소설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이정은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현실은 현실, 픽션은 픽션, 딱 구분해 놓고 살기 때문에 오히려 환상 속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은 생각해 본 일도 없거니와, 조금도 바라지 않는 바였고.
수업 종이 울리고 테일러가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무슨 맘을 먹고 있는 건지 수업은 건성으로 들으며 내도록 짝의 얼굴만 쳐다보는 그가 이정은 어이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예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굳이 놀릴 만큼 통통 튀는 재미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저 초절정미남은 대체 무슨 맘을 먹고 저러는 걸까.
‘설마…… 진짜 내가 니 주인이란 거냐.’
가당찮게도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녀는 곧 붕붕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젓고는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알고 보니 예언의 주인공이라 좌충우돌 세상을 구원하는 여자애 이야기는 이정도 숱하게 읽었지만, 본인이 운명의 여자주인공일 가능성 따위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만화 속 운명녀가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보통 여자애인 건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마음을 현혹하기 위한 수단이지,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그런 운명 따위 진짜로 있지도 않겠지만.
“이건 과학이라니까.”
옆에서 테일러가 속삭였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건들거리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속눈썹이 길고 짙었다. 눈썹도 아주 선명했다. 눈동자는 밤하늘같이 까맸고 피부는 새하얀 게 북유럽 사람 같았다. 깎은 듯 날카로운 콧날이나 좁은 귓불 같은 것이 어른들은 복 없게 생겼다고 할 것 같은, 하지만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면 전형적인 연예인 외모라고 할 그런 얼굴이었다.
“과학이라니. 니가 침대냐.”
해묵은 농담에 테일러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차라리 뱀파이어가 낫겠다. 기계는 사절이야.”
똑같이 영혼이 없다지만 뱀파이어는 생명이라도 있지. 안드로이드가 뭐냐고, 매력 없게.
그러나 테일러는 동의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아.”
이 대목에서 김이정은 조금 비위가 꼬였다.
“니가 충성을 맹세한 건 다른 여자 아냐? 이름 같다고 그게 ‘나’는 아니지!”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앞자리 아이가 돌아봤다.
이정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테일러는 눈을 내리깔더니 책상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이거 읽어봐. 그리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소곤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휙 잡아채 보니 그건 책이었다.
―평행이론이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제목만 봐도 미친 소리임이 분명한 책은 그런데 제법 멀쩡한 사람들이 쓴 책인지 저자들이 박사 나부랭이였다.
“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주인으로 모신 그 김이정이야. 니가 나를 모른다고 해도 그 사실은 달라질 수 없어.”
고작 열여덟 살인 주제에 그는 주인에게 외면당한 노집사처럼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이정이 노집사를 실물로 본 일 같은 건 물론 없었지만, 하여튼.
“나를 부정하지 말아줘. 나는 너 하나만 바라보고 빛을 타고 온 거야.”
테일러의 덤덤한 속삭임에 이정은 한숨을 삼켰다.
남들은 복에 겨워 깨춤을 춘다고 하겠지만 얼굴 잘생겼다고 스토커가 안 무서운 건 아닌 거다. 그 와중에 슬쩍 믿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은 더 무서운 것이다.
이정은 그가 건넨 책을 가방에 쑤셔 넣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저 책은 읽어봐야겠다 생각하면서.
***
테일러가 한 말 중에 이정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건 본인이 안드로이드라는 부분뿐이었다.
뭐, 그렇다 치자. 31세기에 존재하던 안드로이드가 터미네이터처럼 이 시대로 뚝 떨어졌다고 치자.
그녀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건 그 빌어먹을 평행우주라는 것이었다. 링컨과 케네디가 비슷한 인생궤적을 따랐다는 패럴렐라이프 말고, 똑같은 사람이 시공간을 건너뛰어 여러 명 존재한다는 패럴렐유니버스. 테일러 강이 살던 31세기에 김이정이 있었는데 그건 이름만 같거나 얼굴이 비슷한 게 아니라 정말로 같은 인물 ‘김이정’이라는 개소리. 환생이나 이런 것도 물론 아니고.
‘물론 나도 애들이 게임 할 때 세계선 어쩌구 한다는 건 안다고. 그치만 그건 그냥 시뮬레이션 1, 2, 3 같은 거 아냐?’
―고전역학을 뒤집은 양자역학의 핵심은 물질이 입자일 뿐 아니라 파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체는 한 번에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파동은 고정된 위치를 갖지 않으므로, 파동이기도 한 모든 입자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물리학으로 평행우주를 설명한 것이었다. 전자가 움직일 때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거쳐 가는’ 게 확인되었다느니, 나름 근거까지 있었다. 읽을수록 머리 빠개질 뿐이었지만, 요점은 수많은 공상과학영화에 나온 순간이동 장면이 꼭 허황되지만은 않다는 말인 것 같았다. ‘매트릭스에 스미스 요원이 여러 명 나타난 것도 이런 건가, 그러면?’ 이정은 잠시나마 진심으로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평행우주를 팽창이론이라는 것으로 설명해 놓은 챕터도 있었다. 입자로 구성 가능한 조합에 한계가 있는 까닭에,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똑같은 배열로 만들어진 존재가 있다는 얘기였다. 자동차 키를 모두 다르게 만들 수 없어 누군가가 들고 있는 키가 내 것과 같을 수 있는 것처럼. 이쪽은 그럭저럭 이해할 것도 같았다. 비유가 친근하고 현실적이어서 그런지.
아무튼 결론은 세상엔 수많은 평행우주가 있으며 테일러의 주인과 같은 입자로 구성된 ‘수많은 김이정들’이 그 이세계(異世界)에 흩어져 산다는 것이었다. 과거에든 현재에든 미래에든.
“내가 온 세상에서 다중우주 개념은 보편적인 상식이야. 너와 나의 우주는 시간차를 두고 존재하니까 평행우주라기보다 카논우주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지만.”
마치 지구가 네모라고 믿고 있는 중세 사람을 보듯 테일러는 그렇게 조곤조곤 설명했더랬다.
쳇.
이정은 책을 덮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래서 물리를 싫어한다니깐.”
물리학자들이란 지나치게 천재여서 일반인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론들을 늘어놓는데, 죄다 증명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증명 자체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 앉혀놓고 자기네끼리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한 후에 이러저러한 뜻이라고 뻥 쳐도 그런가 보다 하는 것처럼, 무지한 보통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당하는 것 아닌가.
설레지 않았다고?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조각 같은 미남이 문득 다가와 ‘나는 너의 것’ 운운하는데 세상 어떤 여자가 가슴 설레지 않을까. 여섯 살짜리 꼬마든 그야말로 칠십 먹은 할머니든.
그러나 방대한 간접경험을 쌓아놓은 김이정은 알고 있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설령 만에 하나 테일러가 미친놈이 아닐지라도 굳이 그녀 앞에 나타난 건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일 것이다. 멀쩡한 제 주인을 31세기에 내팽개쳐 둔 채 왜 미개한 이 시대로 건너왔겠는가, 초고성능 반(半)생명체 안드로이드가.
“전생의 인연도 아니고, 이건 뭐.”
책을 집어 던지고 벌러덩 누우며 이정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못생긴 애가 들이대는 거보단 백번 낫다 싶었다. 어쨌거나 김이정은 말랑말랑한 소설을 좋아하는 여자애였으므로.
“다른 애들만 모르면 되지. 설마 저도 동네방네 헛소리를 하고 다니기야 하겠어?”
그러니까 아직 깨닫지 못했던 거다, 김이정은. 테일러 강이 얼마나 상식을 우습게 여기는 별종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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