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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

내가 새가 아니어야 하는 이유

시인동네 시인선-166이동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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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74g | 125*204*8mm
ISBN13 9791158965396
ISBN10 115896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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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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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서 손 벌리면 별이 몇 점 열린다
그 별들이 덜컹거리며 으스러지기도 하고
나부끼다가 쏟아지기도 한다
별자리보다 먼 서쪽 하늘에 대고
입 벌리고 서 있으면
가지 사이로 별들이 뉘엿뉘엿 물들고
내 몸에 떨어져 뒹굴던 해거름의 잎사귀들
발등에 피어오르던 풀꽃 그림자들
어린 날 떫고 비리던 달새 울음도
황망히 들려온다 그런 깡마른 봄밤에
말랑말랑한 뭇별 한 점 꺾어다가
가지 끝에 걸어둔다
달밥이 둥실 떠오르는 봄밤
달동네 사람들은 달을 어디에 걸어두고 살아갈까
나는 배고픈 새들의 길을 하늘 꼭대기까지
환하게 열어둔다
그러다가 둥지에서 슬그머니 잠든다
--- 「달밥」 중에서


카메라를 들면 무언가 받아 적고 싶어진다 빈손으로 보내기에 미안했던 가을날의 나무와 새들, 이따금 내게 말 걸어주던 기억 속의 싱싱한 얼굴들, 한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 이파리 같은 그녀의 이름도 몰래 적어둔다 짜릿한 순간들을 온몸으로 찰칵찰칵 받아 적으며 내게 이름 불러주던 사랑스러운 빛줄기들, 저기 깜빡이는 눈빛들이 부시게 소스라치는 울음 한 컷도 선명하게 받아 적는다 하늘가에 울먹이던 발목 삔 먹구름, 그 먹구름이 절뚝이며 걸어가다가 지우고 뭉개버린 모퉁이의 어스름, 별들의 눈짓도 가까이 당겨본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벼랑 앞이던,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어린 날의 촉촉한 눈망울, 그 가녀린 눈망울 너머로 그리운 아버지가 뭉게뭉게 걸어오시고, 저녁의 뭉게구름 너머로 새 필름을 갈아 끼운 내가 아버지의 한 생을 받아쓰기 한다
--- 「카메라 일기」 중에서


새 벽지를 바르려고 꽃송이를 뜯어냈다
땟물 흐르는 중천 하늘이 부욱, 갈라지더니
바닥에 널브러졌다
꽃들이 꺾어지고 부러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을은 세상 모든 얼룩이 꽃으로 돌아오는 계절,
발가벗겨진 방 안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꽃물이 낭자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
함께 울어주던 아침 새들
꽃송이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던 색 바랜 노래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내게서 멀어져 갈
잎사귀만 한 바람들,
벽에는 가을걷이 끝난 들판의 이삭처럼
곰팡이 구름이 알록달록 피어났다
나는 해묵은 가을 하늘을 걷어내고
새 얼룩을 피워 올릴 꽃벽지를 발랐다
--- 「벽지」 중에서


나무가 물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라고 아들이 말했다
나뭇잎은 물드는 게 아니라
추워서 제 몸에 불을 피우는 거라고 나는 고쳐 말했다
단풍나무 몸에는 태양이 숨어 있는 거라고,
손대면 금방 화상 입는다고 나는 아들을 타일렀다
나무 몸에 굴렁쇠가 있다고,
뒹구는 나뭇잎을 가리키며 아들이 일기장을 펼쳤다
어쩌면 나무 몸에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햇살을 밀어내기 때문에
저녁은 꽃잎처럼 물드는 거라고,
그런 날 저녁에는 가지에서 어린 새들이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일어서며 날갯짓을 한다고
아들에게 말해줬다
밤새 나무 밑동을 파고 들어간 잎새들이
꽃등을 켜고 있다고,
빈 가지를 가리키며 아들은 일기에 따라 적었다
--- 「아들의 일기」 중에서


마지막 출근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 버스는 왜 자꾸만 나와 같은 길을 돌아 나올까,
생각하다가
마지막 퇴근 시간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왜 내가 걸어온 길에는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이 많이 떨어져 있을까,
주섬주섬 생각들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아주다가
책상의 물건들을 상자에 쓸어 담다가
텅 비어가는 서랍을 살살 어루만져주다가
이다음 책상의 주인은 어떤 얼굴로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와 줄까
곰곰 되씹어보다가
그 사람을 위해 나는 무슨 말을 적어놓을까
빈 책상 서랍에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워 담아 보다가,
문득 빨간 볼펜을 떠올렸습니다
이다음 책상의 새 주인도 빨간 볼펜을 들고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오면서
마디마디 빨간 밑줄을 그어주기를 바라며
--- 「마지막 퇴근」 중에서


숲은 하얗게 뼈를 비우고 있다 돌배나무 가지 사이를 막 돌아 나온 바람이 잠들지 못한 잎새 울음을 가을날의 능선으로 밀고 간다 숲은 마주하기를 즐겨 하고 돌배나무와 칡넝쿨이 서로 부둥켜안고 맨살 비비며 입맞춤한다 그늘의 온전함과 무심히 지나가는 바람의 무늬들, 나이테와 옹이 박힌 나무들의 꿈은 그지없이 고요하다 숲은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열매와 꽃을 떠나보내고 안으로 푸른 그늘의 고요를 뿜는다 숲에 이르면 이끼들의 초록 돌기의 꿈이 보이고 웃자라는 가지들의 소란함이 보이고 가지 사이에 얹어놓은 둥지가 보이고 밤마다 대책 없이 외출하는 새가 보인다 흙속에서 근심 많은 뿌리들의 잔기침이 들려온다 때로 숲길에 이르면 주술에 걸린 한 남자가 돌배나무로 서 있고, 그 남자의 육체 안에서 나이테를 감아올리는 한 그루 나무가 자란다
--- 「숲으로의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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