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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걷는사람 시인선-051이동
리뷰 총점9.4 리뷰 7건 | 판매지수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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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158g | 125*200*9mm
ISBN13 9791191262766
ISBN10 1191262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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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짧은 매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했다

말이라기보다는 길들이지 못한 야생의 새 같았다 새라기보다는 흙을 뚫고 나오는 첫여름의 아지랑이 같았다 아지랑이보다는 파도에 떠밀려 온 폐그물, 아무것도 잡지 못해 다시 공중으로 흩어지는 빛들, 빛이 닿자 어두워지는 반대쪽 숲의 새소리……

(중략)

사람 대신 사물이 말하는 일이 흔해졌다 그건 알아들을 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건 하나씩을 들고 광장에 모여 백 년 동안 그것을 흔들었다 춤이라고 해야 할까 주술이라고 해야 할까 누구도 표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모두 죽고 사물만이 남았을 때 세상은 단 한 권의 사전이 되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사전을 펼쳐 언어를 학습한다

무언가 쌓여 오르는 꿈에는 중력이 있다 아무것도 쌓이지 않고 오직 쌓이는 느낌만이 연속으로 쌓인다
--- 「시의 작은 역사」 중에서


다시는 신을 믿지 않겠다고 했지만
너를 믿기 위해 나는 위독해지기로 했다

기도하자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이끼가 자라나고
핏속에 이끼가 자라나고

물에서 살과 뼈가 만져졌다
흐르는 것을 붙잡는 손이 생겼다

펜을 들고 탑을 오른다

나도 신이 되려고
--- 「사랑이라는 신을 계속 믿을 수 있게」 중에서


최초의 사랑과 살인이 모두 말싸움에서 시작됐다는 거 알아? 이 대화가 끝나면 우리는 서로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 싸우면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우리도 흩어지는 말들을 쌓아 올려 구름 위까지 올라가 보자 응? 닥치고 내 말 들으라고? 나는 닥치고 귀를 펄럭인다 네 저기압이 무거운 빗방울들을 끌어내릴 때

신이 파랗게 쏟아지며 소리친다 접이식 3단 우산이 너희의 방주야! 우산 밖에서는 비가, 우산 속에서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내 서툰 사랑의 구원인 오늘, 서로 더 말하지 못하게 입술을 삼켜 한 문장짜리 책이 되어 버리는 우리의 신앙
--- 「소나기」 중에서


무덤에 내리는 비에서는

당신이 찬물에 손 씻던 소리가 나

오래전 당신이 신이었을 때

나는 신앙에 미쳐

몇 개의 세상을 환각처럼

고통 모르고 살다 죽었으므로

후회 없는 뼈, 다만 지금은

신을 사랑한 기억이 썩지 않아 뼈아픈

흙속의 긴 불면
--- 「뼈의 불면」 중에서


받으면 자꾸 올까 봐 받지 않았다
울면 자꾸 받을까 봐 울지 않았다
여우비 지나가는 소리일 거라고
절기를 착각한 끝서리의 입술일 거라고
전화벨은 내내 울리고 바람에서는
살아 있는 것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당신이 사는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으므로
꿰미에 걸어 둔 물고기를 강으로 돌려보냈다
첫 매화를 꽂고 싶었을 하얀 귀밑머리들이
흘러가고 벨소리가 멈추고 안개가 걷히고

나는 가장 붉은 매화를 사진 찍어 전송했다
확인할 수 없는 어떤 확인처럼
맑은 날씨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부재중 전화」 중에서


어제의 구름이던 물과 얼음에게
녹는 것과 깨져 뒹구는 것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지 묻고 싶다
죄책감이란 더 아프게 죽겠다는 다짐이니까

산 채로 당하는 조장鳥葬도 있을까
손톱과 눈과 새 떼가 흰빛으로 날아온다
겨울은 나를 쪼아 먹는 부리질
두 팔을 벌린 채
살점 떨어지는 날씨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름 하나 없이 쨍쨍한 우리가
안양천 윤슬로 반짝거리는 봄날이 있다

화르르 쏟아지는 벚꽃 아래

가장 아름다웠던 개종
--- 「첫눈이라는 죄책감」 중에서


한 점의 눈은 선이 되고
선은 최초의 면이 되고

당신이 제게 준 것은
부분은 뜨거워도 전체는 얼 수 있는 마음

그러니까 마치 이글루 속의 모닥불 같은 거

전부 녹아도 일부는 함께 흐를 수 없다면

십 초가 평생이 되어 버린 저는
오늘 밤 눈 내리는 사막의 감정으로
날아가는 토마토의 침울한 희망으로

인간에게 갈래요, 전부 잃어버리기 위해서
--- 「천사의 기도」 중에서


나는 마음을 알지 않으려고
세상을 전부 그림자로 만든 적이 있다

겨울 태양이 외로울까 봐
그를 업고 함께 어두워지는 날에는

들판마다 타오르는 부끄러움이 있다
불로 비춰야만 읽을 수 있는 문장들

펄펄 끓어야 비로소 우러나는 빛

태양이 지닌 단 하나의 작은 빙점을
나는 사랑이라고 배운다
--- 「홍차가 아직 따뜻할 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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