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에게는 나의 입장이 어느 지점에서 상당히 보수적이고 다른 지점에서는 대단히 진보적으로 보이겠지만, 나는 그런 꼬리표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폭력적 세상에서 우리가 진리와 평화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충실하다고 내가 믿는 바를 말하기만 바랄 뿐이다. 윤리학을 고려할 때 신학은 창조와 구속에 관한 주장들에서 시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과 예수의 생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는 모르겠다.
교회의 첫 번째 사회적 과제는 교회가 되는 일이고, 그러자면 인간의 모든 오만한 허세를 비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도 모르겠다. 신학은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다. 왜 그렇고, 어떻게 그런지 이 책이 조명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 p.14
오늘날 우리가 ‘윤리학’에 관해 많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에는 올바른 요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관건은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는 자체의 ‘윤리학’과 무관하게 최선의 행동법에 관한 모종의 비판적 숙고를 전개한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관해서 생각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현대윤리학은 다음과 같은 도덕적 난문제에 집중한다.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가?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거짓말인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의 상태를 말해야 하나? 기타 등등. 이렇게 되면 ‘윤리학’이 모호한 상황과 어려운 결정에 주로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난문제’에 집중하면,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는 신념에 비추어 생각할 때만 그런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흐려진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확신들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같다. 우리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짓말에 대한 우려는 우리가 진실해야 한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혼란스러운 느낌 배후에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가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우리에게 도덕적 안내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 같다.
--- pp.45-46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평화가 우리 힘으로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고 밤낮으로 주장해야 한다. 평화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존재할 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구세주는 참된 주님께 반역하는 이 세상에서 평화롭게 있는 법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는 공통의 인간 도덕성을 상정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차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로운 공동체로 신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진다.
--- p.59
우리는 윤리적 숙고가 파편들 사이에서 사는 모호함에서 우리를 건져줄 거라고 상정할 수 없다. 사실, 정직하고 신중한 윤리적 숙고는 파편화된 세상에서 도덕적 행위자가 겪는 더 미묘한 어려움들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는 모호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곧 확실성 없는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 p.65
하나님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한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할 뿐 아니라 살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 그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모습 때문에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내러티브가 제공하는 ‘자유’는 이처럼 우리 바깥의 누군가의 형태로만 찾아오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찾아와야 한다. 나는 타인에 의해 나 자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만큼만 행위자일 수 있다.
--- p.119
‘자신과의 평화’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실제로 우리가 아무 어려움 없이 살 거라는 의미는 분명히 아니다. 누구도 의로운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사실이겠지만, 이것과 어려움 없이 사는 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자신과의 평화’는 자기와의 갈등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뇌하는 죄인으로 남기 때문이다. 참으로, 고뇌하는 죄인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자들에 대한 최고의 서술일 것이다.
‘자신과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고, 그 확신은 하나님 나라라는 모험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자기몰두에서 벗어나면서 그 확신은 우리 성품과 자유의 원천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평화를 누리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서로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자유가 우리가 소유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이다.
--- pp.126-12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한 책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기억을 통해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그 책의 텍스트와 분리된 철학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한 책의 사람들인 이유는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을 이스라엘 민족과 특정한 한 사람인 예수의 생애 안에서 알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진리’는 본질적으로 우발적이며, 기억에 의해서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다. 우리는 그 기억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 기억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 거듭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되고, 그 와중에 성경에 비추어 우리 기억을 시험한다.
그래서 기억은 도덕적 훈련이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와 죄를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우리가 간직하도록 맡겨진 이야기를 올바르게 들려줄 수 있다.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우리 죄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용서를 경험해야만 우리는 그 이야기가 우리 삶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증언할 수 있다.
--- p.164
예수께서 시작하신 평화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환대의 의무로 가장 명확하게 구체화되는 사랑의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낯선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대하는 자아를 갖춘 백성이어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의해 확장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는 법을 배우는 가운데 우정이 우리 삶의 방식이 된다. 예수의 나라는 친구들에 대한 헌신을 요구하는 나라이다. 친구들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라는 여정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야만 우리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p.201
기독교 윤리학이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난다면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가 시대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경험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그것을 전하고 듣는 데 관여하는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이야기는 들려주고 기억하는 일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 이야기의 존속에는 역사적 백성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현존을 역사적이고 우발적인 공동체에 맡기셨는데, 이 공동체는 과거의 성공에 의지할 수 없고 대대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그 이야기가 예배, 자치, 도덕 안에서 만들어지고 영향을 받는 한 백성의 관습 안에서 구현되는 이유이다.
--- pp.212-213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는 역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나라의 삶의 방식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에 대한 소망을 결코 잃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 그들도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폭력으로 빠르게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은 불의를 종종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불의를 결코 묵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이웃이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방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도 우리 이웃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저항하되 우리의 방식으로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죄와 불의에 버려 두는 일과 같다.
--- p.227
비폭력주의는 나의 중요성과 안전을 보장해 줄 것 같은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로 지내는, 평생에 걸친 훈련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많이 잃으면 잃을수록, 기쁨의 삶을 살 가능성은 더 커진다. 기쁨은 언제나 놀랄 준비가 된 자세에서 나오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 기쁨은 뜻밖의 일들이 우리 삶을 지탱해 준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성향이다. 기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은 어쩌면 친구, 배우자, 자녀 같은 우리 존재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요소들을, 아무 권리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순전한 선물로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 p.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