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도 속은 산소가 희박해 숨이 차고 습한데다 뜨거운 지열에 가만히 있어도 작업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젖은 작업복이 거치적거리니 아예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탄가루와 땀이 범벅이 돼서 얼굴은 진흙 팩을 한 꼴이야…. 흰 눈동자만 보이지…. 침을 뱉으면 탄가루가 섞인 시커먼 침이 나왔어. (…) 점심때가 되어 도시락을 찾아 먹어야 하는데 탄가루가 내려앉아 어디가 도시락인지 구분돼야지. (…) 손으로 휙휙 쓸어서 찾아 먹었어.”
조지송은 눈물과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된 식은 밥을 반찬도 없이 소금을 뿌려 입속에 떠 넣으면서, 교회가 이 비참한 삶을 모른다면 결코 한 사람의 광부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곡괭이로 헬멧의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검은색 탄맥을 내리찍을 때마다 예수님이 당한 매질과 피 흘리셨던 그 처절한 고통이 느껴졌다.
“산업선교 하려는 목사들은 어디 가서 노동을 충분하게 해야 한다. (…) 노동자들이 허리 아픈가, 얼마만큼 졸린가, 인격적으로 얼마만큼 수모를 당하는가 그런 것을 다 겪어보고, 그러고서 노동자가 쳐다보여야 한다. 야, 이런 것을 견뎌가며 살아가는 그런 엄숙한 모습. 정말 저것이 예수님의, 사람의 엄숙한 종교행위로까지 보이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도록 애써야 된다 이거지. 그냥 노동자를 도와야겠다, 복음을 전해야겠다, 뭔가 노동자에게 봉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허구라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노동을 해야 한다.”
--- p.52~53
“나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 여기(노동조합)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이웃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배우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우며,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실천적으로 배우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은 산업선교 실무자들의 목회 현장이고 노동자 구원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전도가 초기의 전통적인 공장 목회(예배, 성경공부)와 평신도산업전도연합회 활동을 거치면서 그 한계를 깨닫고 노동조합운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산업 현장에서 약자인 노동자의 아픔을 깨닫고 노동자의 품인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참 교회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전도가 마침내 노동자의 벗이 되어 함께 고난받을 가시밭길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 p.82
회사는 8월 3일부터 9월까지 남자 기사들과 안양 공장에서 지원받은 남자 직원 150여 명을 동원하여 물리력과 폭력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정시 퇴근을 막기 시작했다. 그들은 작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밀치거나 때리고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져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 쌍년들아, 개 같은 년들아, 너희들이 우리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느냐?” “여덟 시간만 일하고 나가는 년들, 모가지를 비틀어놓겠다.”
회사는 교활하게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라면서 남녀 노동자들 간의 싸움으로 몰아갔다.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 직원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 회원 노동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김금순은 머리를 다쳐 실신했고, 다른 회원들은 뺨을 맞거나 머리채를 잡혀 끌려 다녔다. 관리자들의 사주를 받은 남자 직원들의 폭력은 점점 더 심해졌다. 김추련은 짓밟혀서 10일 진단을 받는 상처를 입었고, 하명숙은 오른손 손가락이 골절되었으며, 그 밖에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부상을 당한 채 화장실과 발효실, 창고 등에 감금되었다. 대책 회의 중 기습적인 폭력에 실신한 김순례와 김고만은 창고에 내던져진 채 방치되었다가 의식불명에 빠져 9일간 입원하기도 했다.
--- p.153~154
80여 명이 서명해서 요구한 조건을 정리해 회사에 들이밀었다. 그 요구 조건이란 이런 것이었다. “때리는 것을 중단하라.” “청소 시간도 일이다, 임금으로 계산하라.” “주휴, 월차, 연차, 생리 휴가를 근로기준법대로 실시하라.” “퇴직금을 지급하라.” “24시간 노동 못 하겠다.” 요즘 기준이라면 이런 것도 요구해야만 하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한 한심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일화학 노동자들에게는 절박한 현실 문제였다.
개선해야 할 시급한 일은 24시간 연속 중노동이었다. 24시간 동안 노동을 하고 나오면 생기발랄한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이 중환자실에 몇 달은 입원한 사람의 얼굴처럼 되어버렸다. 기본급이 1만 3000~1만 4000원 정도라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었기에 더 벌기 위해 회사가 요구하면 열네 시간도 일하고 24시간도 일해야 했던 것인데, 이젠 못하겠다고 작업 거부를 시작한 것이다. 관리자 앞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달라진 눈빛으로 쳐다보며 똑 부러지게 더는 못하겠다고 하니, 회사 간부들이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하고 놀랄 지경이었다.
--- p.163~164
1977년 1월 3일 자 [타임]은 조지송 목사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노동자들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정부가 제공한 산업선교에 대한 거짓 정보를 그대로 옮겨놓거나 대체로 산업선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는 국내 언론과 달리 외신은 노동 현장의 실상과 산업선교의 역할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그들은 산업선교의 실상에 접근하려 했으며, 조지송 목사가 말해주는 한국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세계의 양심이 한국의 산업선교와 노동투쟁을 주목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산업선교의 활동상과 탄압 사실을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스], [LA 타임스], NHK, 독일 교회 신문 등 세계적으로 유수한 언론들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동등한 비중으로 보도를 하여 산업선교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한 상징처럼 여겨졌다. 이 때문에 정부는 산업선교를 탄압하면서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언론을 동원한 여론몰이에 치중했다.
--- p.204~206
“인간의 인격보다 자본과 기술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노동자가 대학 교수나 성직자보다 낮은 계급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 하나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사회 속에서 실증되지 못하는 한 교회의 외침은 아무 효과도 기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동의 강도는 높고 임금은 낮은 경제 현실에 사는 노동 대중은 모든 문제를 원망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 교회는 무엇으로 그들의 짐을 나누어 지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 누군가가 조지송 목사에게 1970~1980년대의 산업선교가 무엇을 지향했느냐고 굳이 묻는다면, 공장 안에 기독교인이 더 많이 생기도록 했다거나 노동자를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오직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싸우도록 했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 출애굽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진정한 예배를 올리기 위해 노예 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떠났듯이, 노동자의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35~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