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과 함께 축제의 일정을 살펴본다면, 아테네인들이 정말 많은 축제를 통해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제는 때로는 공동체 전체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그 구성원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개최되었고, 때로는 일상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소외되었던 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분출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종교와 문화, 그리고 정치적인 기획이 어우러져 축제가 기획되고 실행되었으며, 축제와 함께 아테네인들은 고된 삶을 견뎌내고 이겨나갔던 것이다
---「1. 축제_아테네의 축제와 시민으로서의 삶」중에서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에서 제우스는 인간을 통치하는 원리로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을 제시한다(《아가멤논》 177). 이는 비극을 통한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다. 극장에 모인 관객들은 비극의 주인공이 겪는 고통에 연민과 공포를 느낌으로써 자신의 삶에도 닥칠 수 있는 여러 윤리적인 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도 비극의 주인공과 똑같이 행동하기 쉬우며 마찬가지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상상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깨달음의 순간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목적, 즉 카타르시스(정화淨化)라 하겠다.
---「2. 비극_그리스 비극과 시민 교육」중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권리란 곧 누 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권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어떠한 외부적 제한이나 속박 없이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연설은 ‘자유 연설’ 즉 ‘파레시아parr?sia’라고 불렸으며, 이러한 연설에 관한 시민의 동등한 권리는 ‘이세고리아is?goria’라고 불렸다.
정치적 권리가 다른 분야에서 자신이 누릴 권리를 조정하고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경제, 재정, 법률, 복지와 관련된 시민의 권리는 모두 이 자유 연설의 권리에 의존했다. 다른 모든 권리가 예속되는 가장 핵심적인 권리인 정치적 권리야말로 시민의 가장 주된 권리였으며, 이 권리는 파레시아 즉 연설의 자유이자 자유 연설의 형태로 드러났기에, 아테나이 시민으로서의 ‘자유로운 자’란 결국 궁극적으로 ‘연설하는 데서 자유로운 자’를 의미했다.
---「3. 자유_파레시아, 모두가 말할 권리」중에서
고대 아테네 시민 민주정치의 지혜를 돌아보자. 그들은 통치자나 피치자가 차이 없이 똑같은 자질을 가진다고 보았다. 다만 돌아가면서 통치를 담당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민은 평등하며 조금도 차이가 없고, 또 시민이 교대로 지배도 하고 지배받기도 한다. “일찍이 복종할 줄 모르는 자는 좋은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통치자와 피치자는 동일하지 않으나 선한 시민은 양편에 다 같이 능해야 한다. 어떻게 자유인으로서 통치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자유인으로 복종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시민의 덕성이다. 지배자의 절제와 정의는 피치자의 것과 다르지만, 선량한 사람의 덕성은 양쪽을 다 같이 포함한다.
---「4. 민주주의_누가 결정하는가?」중에서
로마는 제국을 팽창해나가면서 두 번의 중요한 시기에 두 번의 중요한 시민권법을 제정했다. 하나는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한 뒤 100년이 채 안 지난 기원전 89년에모든 이탈리아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실상은 마지못했던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이탈리아 주민을 전부 로마 시민으로 만들었다.
그 뒤 이탈리아를 벗어나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로마 제국을 건설하고 평화롭게 운영하고 있던 212년에 놀라운 법령이 또 하나 나왔다.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 제국의 전 자유인이 전부 시민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특징을 말하자면, 시민권이 특권인데도 그 특권적인 것을 비시민과 나누고 문을 열어 잡종을 만들 용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혼종성hybridity와 개방성openness. 로마 제국이 500?6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5. 시민권_나는 로마 시민이다」중에서
플라톤과 키케로를 비교해보자. 플라톤은 아테네 출신이었고, 키케로는 이탈리아의 아르피눔 출신이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사형당한 뒤 아테네의 정치 현실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시킬리아에 가서 실현해보려고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에 반해 키케로는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연설가이자 정치가였다. 키케로는 여러 방면에서 돋보이는 성취를 이뤘다. 키케로는 기원전 63년에 로마 최고의 정무관인 집정관으로 선출된 정치가였다. 그는 정통 귀족에 속하지 않는 기사계급 출신이었지만, 연설의 재능과 실력으로 계급적 한계를 뚫고 출세했다. 플라톤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카틸리나 사건을 계기로 키케로는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 혹은 국부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칭호는 아니었다. 사실 로마 역사상 키케로 이전에 딱 한 명만 그 칭호를 받았다.
---「6. 연설_설득의 정치가_키케로」중에서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와 그의 형제 레무스에 대한 전승에서도 레무스가 신성한 경계를 침범해 살해되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로마는 레무스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고도 한다. 형제의 이야기에서 무법의 세계가 극복되고 법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이 상징적인 서사로 그려진다.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 하루는 새의 움직임으로 우위를 정하기로 했는데, 로물루스가 승리해 권력을 거머쥐었다. 레무스는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복하지 않고 승자인 로물루스가 건축 중인 로마의 성벽마저 무시했다.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임으로써 결국 종교, 기술, 법 내지 제도의 모든 면에서 로마 국가의 토대를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7. 법_로마법, 국가 아닌 시민의 법」중에서
욕실이나 세면실은 물론이고 목욕탕 같은 시설은 대저택을 제외하면 일반 주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공간이다. 변소도 마찬가지다. 규모가 있는 저택이라 하더라도 변소는 최대 하나였으며,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변소가 부엌에 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리하고 있는 노예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볼일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변소가 부엌과 공존하게 된 이유는 하수와 오물 처리라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부엌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하수를 변소의 오물과 함께 처리하는 것이 간단했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다.
---「8. 건축_도무스, 빌라, 인술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