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도 없고, 와이파이도 되지 않았다. 남아공에서 오래 살았다지만 지도도 없이 똑같아 보이는 길을 찾아가는 것을 보며 신기하기만 했다. 11년 전 처음 방문했던 남아프리카의 모습은 한국의 80년대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때만 해도 치안이 지금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자 긴장되었다. 물론, 지금도 6시 이후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레스토랑을 찾아 한참을 달렸고, 가로등 하나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길은 더욱 어둑해졌다. 이때부터는 자동차 야간 불빛에 의지해 몇 미터 앞만 겨우 보이는 길을 가면서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부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며 속으로 기도했다. 임신 초기 입덧으로 오랫동안 차를 타니 힘들었다. 허리는 아프고, 배꼽시계가 울렸다. 점점 신경이 예민해졌다.
--- 「남아공은 나라 이름입니다」 중에서
현지에서 살다 보니, 노숙자여서가 아니라 외부인을 집으로 들인다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일이다. 남아공은 가사 도우미인 메이드와 정원 관리사인 가드너를 고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우리 같은 작은 집은 사람들을 고용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한국의 단독주택 같은 이곳의 하우스는 집이 크고 관리해야 할 것이 많아 사람을 고용한다. 특히 백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메이드와 가드너의 손을 빌리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다림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점을 악용하는 흑인들도 종종 있다. 10년이 넘도록같이 일하던 메이드는 집안 음식이며 물건들을 밖으로 빼돌리기도 하고, 가드너는 집에 사람이 비는 틈을 타서 도둑질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정보를 흘리기도 한다. 데리고 일하면서 돈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면 좋은 장비를 훔쳐 달아나는 경우도 있다. 모든 메이드와 가드너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사람을 쉽게 집에 들이지 말고 믿지도 말아야 한다.
--- 「남아공 서바이벌」 중에서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꾀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붙잡고 억지로 시킨들 큰 효과를 못 볼 걸 알았다. 한국에서 떠나오면서부터 교육에 대한 욕심은 조금 내려놓았다. 남아공 교육은 한국처럼 교육 열기가 뜨겁지 않다. 한국처럼 야간 자율학습이나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는 일은 없다. 그러나 고학년일수록, 사립학교일수록 아이들의 학습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진다. 개인 교사를 붙이고, 예체능 교습소에 다니고, 구몬 수학 학습지를 배달받아 푸는 아이들도 있다. 엄마의 교육 철학에 따라 아이들의 학습방법은 달라진다. 나는 학창시절 학구열이 높은 학생이 아니었다. 지금도 아이들의 공부에 학구열이 높은 엄마는 아니다.
“한국에 가서 학교 다닐까?”
“아니! 한국에서는공부를 많이 해야 하잖아. 싫어.”
아이들이 한국에 가기 싫은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아이들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데도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하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에 관해 이야기하면, 가장 반색하는 아이는 막내다. 요엘은 말이 트이기 시작할 무렵 남아공으로 왔기 때문에 ‘아빠’소리도 못했다. 6세가 된 지금은 못 하는 말이 없지만, 아직도 혀짧은 소리를 낸다.
“엄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영어 못해. 그래서 친구 못 만나. 우리 한국 갈까?”
--- 「삼남매 육아일기」 중에서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붙여넣었다. 사진을 붙여넣으며 일과를 돌아보았다. 작은 것에 집중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다시 힘이 났다. 매일 저녁에 쓸 일기를 생각하며 하루의 순간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무엇을 했는지 기록했다. 한 달이 되던 날, 그간의 일기를 하나씩 살펴보고 화면을 가득 메운 기록을 보니 무척 뿌듯했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은 지겨웠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평범한 일상도 일기로 기록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모두 색다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 「그냥 도전해 볼게요」 중에서
“뭐, 할 줄 아는 건 많아도 실속이 없어요. 제가…….”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면 쉽게 되받아치는 말이다. 겸손을 떨고 싶어서가 아니라 으레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악기도 서너 개는 다룰 줄 알고, 재봉틀, 베이킹, 그림, 글쓰기, 영상편집 등 여러 분야를 경험했다. 보육교사, 원장, 사회복지사, 컴퓨터활용능력, 캐어 복지사, 가베, 상담심리사, POP, 비건 베이킹 등의 자격증도 있다. 그러나 이중에서 직업으로 삼았던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자신 있게 잘한다고 나서지 못한다. 스스로가 완벽하게 숙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들기보다 어느 정도 선이 되면 멈췄기 때문이다. 결국 내 선택이었다. 잘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더 노력하지 않았다. 환경을 핑계 삼고, 한계를 바라보았다.
---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