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의 시를 읽으며 텍스트의 부분과 전체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한 편의 시를 독립된 구조와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이 숨기고 있는 내면 동력까지 포착하기 위해서는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서 그 위상과 의미망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시집을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 리듬 이미지가 충돌하여 확장되면서 흘러가는, 유동적 흐름으로 간주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더 나아가 한 편의 시가 지닌 의미와 위상은 그것이 수록된 시집을 시적 전개의 전체적 과정 속에서 조망할 때 더 넓은 시야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최영철의 다섯번째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삼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집은 최영철 시의 전개 과정에서 이전의 시적 차원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기 반성과 갱신을 통해 획득한 새로운 시적 차원을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일종의 연작시 형태로 시도된 경우는 ‘시네마 천국’이란 부제가 붙은 일련의 시편들과, ‘푸조나무 아래’라는 부제가 붙은 일련의 시편들이다. 이 중 이번 시집의 특징을 징후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는 후자일 것이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서정시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듯이 보인다.
잎 하나 피우는 내 등뒤로
한 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한 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그때마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잎―푸조나무 아래」 부분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의 내면적 감정의 표출은 서정시의 보편적인 발화 방식이다. 주지하는 대로, 여기서 ‘당신’은 연인과 이상적 가치를 포함하는,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상징한다. 인용 시는 이러한 서정시의 보편적인 존재 방식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그렇다면 도시적 일상 속에서 누추한 이웃에 대한 연민과 분노의 시선을 견지하며 독자적인 시적 위치를 형성해온 최영철의 시는 이 지점에서 기존의 서정시로 되돌아간 것인가? 인용 시를 포함한 ‘푸조나무 아래’ 연작은 단순히 서정시로의 회귀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과의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존의 일반적인 서정시의 경우,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는 시인 자신의 분신이거나 내면적 자아를 대변하는 상관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나’는 고유하고 자명한 주체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자아인 것이다. 그런데 인용 시에서 ‘나’는 ‘나무’의 속성과 운명을 지닌 채 ‘당신’을 그리워한다. 시인 스스로 나무가 되어 있는 상황은 시적 자아의 인간적인 측면, 다시 말해 사유 주체로서의 자아관에서 이탈해 있는 모습이다. 이럴 때 ‘나’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당신’ 또한 기존 서정시의 경우와는 다른 위상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용 시에서 ‘당신’은 ‘샛별’ ‘소나기’ 등의 자연물로 나타난다. 당신이 자연물로 형상화된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나’와의 관계성을 고려할 때 예사롭지 않은 차이를 드러낸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가지를 뻗”는 ‘나무’의 제한된 움직임에 비하면, “샛별로 오고” “소나기로 오”는 ‘당신’의 움직임은 원활한 능동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당신’의 위상은 이별한 연인이나 높은 경지의 이상적 가치라는, 기존 서정시의 고정된 ‘당신’의 위상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영철의 서정시가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은, ‘나’와 ‘당신’이 각각 자연물로 형상화되면서 상호 운동성을 지니는 연관적 관계로 설정된 데 있다.
결국 최영철의 서정시는 변모된 ‘나’와 ‘당신’의 관계망을 통해 기존 서정시의 존재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우리는 그의 시가 전체적으로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자연으로 그 육체를 전이시켜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이는 공간적 차원, 즉 도시적 공간에서 자연적 공간으로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당신’의 위상 변화는 그 전이가 사유 주체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존재적 전환의 계기와 나란히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최영철 시에서 이 존재적 전환의 계기는 공간적 차원뿐 아니라 시간적 차원과도 긴밀히 결부되어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까지의 징후 발견적 시 해석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숭숭 하늘 향해 솟은 나무 그늘에 서 있었다
곧고 푸른 지조가 만들어낸 텅 빈 육체에서
플루트 소리가 났다
위로 뻗어가느라 아무것도 품지 못한 생애가
한 번은 꽃 피고 한 번은 꽃 지고 싶다고
우수수 잎을 날려보냈다
나이를 숨기느라 마디진 등뼈 타고
초록을 물들이며 노랗게 솟는 대쪽의 亢進,
창공을 버티느라 굵어지지는 않고
다만 단단해진 울대가
무성한 잎을 떨어뜨렸다
위로 뻗기만 하는 삶을 받치려고
실타래처럼 엉킨 땅 아래 상념들 스산하게 흔들렸다
너 한 번 꽃 필 때마다 하늘 향한 가지 꺾이고
너 한 번 꽃 피려고 무너진 자리
우르르 몸 기댄 백로 제비꽃 와서 피었다.
―「대숲에서」 전문
앞에서 시집 전체를 유동적 흐름으로 간주했는데, 이 시는 이번 시집의 다양한 물살들이 하나로 모여 소용돌이쳤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여울과도 같은 작품이다. 다시 말해, 시집 전체의 의미 구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대숲 그늘에 서서 대나무를 바라본다. 이때 대나무는 단지 관찰의 대상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화자 자신의 생애까지 표상하고 있다. “곧고 푸른 지조가 만들어낸 텅 빈 육체”와 “위로 뻗어가느라 아무것도 품지 못한 생애”는, 시인이 대나무의 형상에 자신의 생애를 투사하고 다시 바라보면서 반성적 성찰을 시도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시는 ‘대숲에서’라는 공간적 위상과 ‘대나무’라는 시적 자아의 형상을 통해 자연으로의 공간적 존재적 전이라는, 최근 시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너’는 「잎―푸조나무 아래」에서 ‘나무’로 형상화되었던 시적 자아 ‘나’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샛별’ ‘소나기’로 나타났던 ‘당신’은 1행의 ‘하늘,’ 혹은 마지막 행의 ‘백로 제비꽃’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결국 이 시는 ‘대나무’와 ‘하늘’ ‘백로 제비꽃’을 통해 ‘나’와 ‘당신’의 관계를 변주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 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