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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포에지-043이동
리뷰 총점9.7 리뷰 3건 | 판매지수 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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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96쪽 | 168g | 130*224*7mm
ISBN13 9788954685160
ISBN10 8954685161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시인의 말
개정판 시인의 말

1부 그때 나는 괴로웠을까 행복했을까
천장호에서 / 오 분간 / 그곳이 멀지 않다 / 푸른 밤 / 그때 나는 /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벗어놓은 스타킹 / 구두가 남겨졌다 / 칸나의 시절 / 품 / 열대야 / 누에 / 시월 / 만삭의 슬픔

2부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고통에게 1 / 고통에게 2 / 때늦은 우수(雨水) / 빚은 빛이다 / 마음, 그 풀밭에 / 내 속의 여자들 / 밤길 / 웅덩이 / 어떤 항아리 / 그러나 흙은 사라지지 않는다 / 길 속의 길 속의 / 밀물이 내 속으로 / 또하나의 옥상 / 귀여리에는 거미줄이 많다 / 이끼

3부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속리산에서 / 뜨거운 돌 / 계산에 대하여 / 누에의 방 / 마지막 양식 / 그 골목 잃어버리고 / 황사 속에서 / 부패의 힘 / 가벼워지지 않는 가방 / 종점 하나 전 / 활주도 없이 / 손의 마지막 기억 / 성공한 인생

4부 모든 존재의 소리는 삐걱거림이라는 것을
포도밭처럼 / 거리 / 쓰러진 나무 / 복장리에서 / 나뭇잎들의 극락 / 대동여지도는 아니더라도 / 저 자리들 / 왜 / 사랑 / 밥 생각 / 소리들 / 사흘만 /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 발원을 향해 / 그 이불을 덮고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푸른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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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책소개

나희덕 시인의 세번째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를 문학동네포에지 43번으로 다시 펴낸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간명하고 절제된 언어”(김진수)로, 그러나 커져가는 세계의 균열을 결코 보아 넘기지 않는 강건함으로 달려온 그다. 오래 사랑받았고 여전히 생생한 이 시집을 다시 펴냄은 서정마저 불온하다 의심받는 지금의 시대에 ‘제 단단함의 사슬’로 지켜온 그의 엄격이 기실 안는 품임을, 잡는 손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일이다.

새로 산 가방에 이끌려 돌아오는 길
혁명은 안 되고 나는 가방만 바꾸었지만
공허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 무거움이 마음의 굳은살을 만든다

그걸 알면서
또 헛되이 가방을 살 것이다
채울 수 없는 빈 방을 내 안에 들여놓는 일처럼 _「가벼워지지 않는 가방」 부분

시인은 신음하나 고통을 토로하지 않으며, 세계를 재단하는 대신 내부를 가다듬는다. 그래서 25년 전의 시집을 다시 돌아보는 지금 스스로를 가만히 위로하게도 된다. “그때의 나는 왜 탱자 꽃잎처럼 얇은 마음을 찔리면서/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 줌의 재와 침묵을 쥐고 있었던 것일까”(개정판 시인의 말). 그가 품은 것은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면서 정작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 유일한 이는 시인 자신인 까닭이다. 그렇게 기꺼이 울음을 먹고 칼날을 삼킬 때 이 고통스러운 자기 경신은 외부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의지이며, 그렇게 시인에게 “사랑이란 고통에 관해 말하지 않는 방법”(황현산)이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 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_「탱자 꽃잎보다 얇은」 부분

슬픔 속에서 그 사연을 풀어내지 않으려는 침묵, 고통을 말하지 않는 시인은 대신 기다림의 의지를 결연히 할 뿐이다. 너의 이름은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이 되어 새떼 대신 메아리만 날아오르는데(「천장호에서」) “너는 정작 오지 않”는다(「고통에게 1」). 그러나 이 삼킴, 이 절제의 밑바탕에 ‘견고함에의 의지’가 있다면 그의 부단한 헛발과 헛걸음조차 끝내 ‘너’에게로 향해 있는 까닭이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그 무수한 길도/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라, 끝내 “나의 생애는/모든 지름길을 돌아서/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푸른 밤」)이었음을 고백하듯이.
시인은 시의 슬픔을 마른 폭포, 건천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비유한 바 있다. 그것은 또한 “채탄되지 못한 슬픔”(「때늦은 우수(雨水)」)이고 “얼어붙은 호수”일 테다. “불빛도 산그림자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천장호에서」) 말하였으나 그렇게 단단하게 침묵함은 기어이 들려오는 세계의 소리에 귀기울이겠다는 의지가 된다. 스스로를 옭매는 사슬이 아니라 너에게로, 그곳으로 가겠다는 약속이고 결속일 테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숨을 거둘 때는/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오는 법임에(「그곳이 멀지 않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잊어야 할 것조차 잃어버린 적이 없는” 자리로, 사람들의 자리, 사람 곁으로.

저 자리들은 어떤 뜨거움을, 꽃을, 누구의 등을, 또는 손이나 발의 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발길에 닳아빠져 가운데가 우묵해진 나무 계단, 붉은 불빛 아래 치욕에 시들어가는 여인들의 살갗, 누군가 지친 등을 기대었던 담벼락, 고즈넉한 꽃 한 송이 피워올렸던 꽃받침, 문 밖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연탄재, 반생의 기억에 저를 둥글게 말아서 남은 반생 또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잊어야 할 것조차 잃어버린 적이 없는, 저 자리들, 누군가 남기고 간 자리들 _「저 자리들」 전문

“그곳이 멀지 않다, 고 여전히 말해보려 합니다”(개정판 시인의 말). 출간된 지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한결같이 사랑받아온 이 시집을 다듬어 펴내며 시인은 다시 ‘그곳’으로 향한다. “그가 구두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구두가 여기까지 그를 이끌어온 게 아니었을까” 반성하며, “구두가 멈춘 그 자리”에서 문득 멈추었던 걸음(「구두가 남겨졌다」)을, 그러나 다시, 옮기는 것이다. 아직 더 걸을 수 있기에, 그곳이 멀지 않으므로.

화엄사 뒷산
날개도 채 굳지 않은 날벌레들
벌써 눈 뜨고 날아오겠다

발 녹인 나도
한 닷새는 더 걸을 수 있겠다 _「그 이불을 덮고」 부분


■ 기획의 말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 시인의 말

초판 시인의 말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 이 잔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1997년 10월
나희덕


개정판 시인의 말

1997년에 나왔던 시집을 옛집에 돌아온 듯 다시 읽으며
서른 살 무렵의 나를 만났습니다.

그때의 나는 왜 탱자 꽃잎처럼 얇은 마음을 찔리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 줌의 재와 침묵을 쥐고 있었던 것일까.
안쓰러운 생각에 책등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습니다.

서투른 대목이 눈에 띄어도 덧칠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시기마다 그때에만 쓸 수 있는 시가 있으니까요.

다만, 마침표와 쉼표, 지시어와 복수접미사를 조금씩 덜어냈습니다.
무언가를 특정하거나 구분하려는 의지를 내려놓고 싶어서지요.
지나치게 명료한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 행간을 넓혔더니
말들이 예전보다 숨을 편하게 쉬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젊은 날에 썼던 시에 대한 저의 작은 우정입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곳이 멀지 않다, 고 여전히 말해보려 합니다.

2022년 1월
나희덕

회원리뷰 (3건) 리뷰 총점9.7

혜택 및 유의사항?
구매 리뷰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h*******g | 2023.07.18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이전에 필사 시집에서 나희덕 작가의 시 작품들을 몇 번 읽고 나서는 나희덕 작가의 시 작품들에 관심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김에 작가의 시집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 모두 굉장히 마음에 들고 읽을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등의 울컥함을 만들어내서 좋았습니다. 작가의 다른 시집들도 구매하고 싶네요. 감성적일 때 시 작품을 한 편씩 읽고 싶을 때 좋;
리뷰제목
이전에 필사 시집에서 나희덕 작가의 시 작품들을 몇 번 읽고 나서는 나희덕 작가의 시 작품들에 관심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 김에 작가의 시집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 모두 굉장히 마음에 들고 읽을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등의 울컥함을 만들어내서 좋았습니다. 작가의 다른 시집들도 구매하고 싶네요. 감성적일 때 시 작품을 한 편씩 읽고 싶을 때 좋은 것 같습니다.
1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1 댓글 0
실패할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t****************s | 2022.05.18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시란 실패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어떤 실패를 기록했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기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에 가깝다. 이 말속에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들어 있다. 어떤 감정을, 혹은 어떤 진실을 우리의 언어가 결코 정확히 표현해낼 수 없다는 불신. 그 불신은 아마 타당할 것이다. 가령 '슬프다'는 말은 얼마나 부정확한가.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때도 '슬픈' 것이고 가장 친한;
리뷰제목

시란 실패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어떤 실패를 기록했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기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에 가깝다. 이 말속에는 언어에 대한 불신이 들어 있다. 어떤 감정을, 혹은 어떤 진실을 우리의 언어가 결코 정확히 표현해낼 수 없다는 불신. 그 불신은 아마 타당할 것이다. 가령 '슬프다'는 말은 얼마나 부정확한가.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때도 '슬픈' 것이고 가장 친한 친구를 사고로 잃었을 때도 '슬픈' 것이라면, 이 광범위한 말이 어떤 정확한 진실을 포착하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 그 순간의 진실은, 그리고 그 진실과 결부된 내 감정은, 그렇게 부정확한 언어로 어설프게 번역되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언어는 진실을 보존하지 못하고 훼손한다. 이런 말들이 지나치게 들리는가?

그러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은 시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그 부정확하고 비논리적인 언어와 싸운다. 이들은 발목을 삐었을 때 '슬프다'보다 더 정확한 다른 표현이 존재할 것이라 믿는 이들이고, 친구가 사고로 죽었을 때도 단순히 '슬프다'는 말 말고 진실에 가까운 다른 언어에 도달하려는 이들이다. 어떤 시인도 쉽게 쓰고 말지 않는다. 가령 이들은 '슬프다'는 쉬운 말 대신 이렇게 쓸 줄 아는 이들이다. "내가 주워올린 것은/흙 묻은 나의 심장이었다"(<그때 나는> 중) 시인들은 기존의 언어를 믿지 않으므로 다른 언어를 찾는다. 굳이 이렇게 어렵게 써야 하냐고? 그들은 쉬운 말을 버리고 일부러 어려운 말을 택한 게 아니다. 부정확한 말을 버리고 정확한 말을 택한 것이다. 아니, 택했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정확해지기 위해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직업의 기반을 언어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언어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어떻게든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고 해체하고 파괴해서 그것이 진실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인의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이것이 핵심이다.) 완벽한 말이란 있을 수 없고, 그런 것을 꿈꾸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어떻게 표현하든 진실은 새어나가기 마련. 모든 시인의 꿈이 언어가 진실을 담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생각이 말이 되어 튀어나오고 현실이 텍스트가 되어 쓰여지는 순간 원래의 것은 손상을 입는다. 손실 없는 번역은 없다.

따라서 언어와 진실 사이의 관계에서, 언어는 언제나 진실의 포로다. 진실이 언어의 포로인 것이 아니고, 언어가 진실에 끌려다닌다. 진실이 꼭 한발 앞선다. 언어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꼬리잡기를 하고 있다. 시가 늘 실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시인도 이 점에 있어 완벽히 성공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 다만 그 실패가 아름다운 실패인 것은, 시인들이 잡을 수 없는 진실을 언어로 잡으려고 할 때 그들의 그 불가능한 노력이, 우리의 가능한 체념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희덕의 세 번째 시집을 펼쳐 보니 이런 실패가 보인다.

 

놀고 들어온 아이가 양말을 벗으며 말했다

-아빠가 불쌍해요.

-왜, 갑자기?

-아빠는 죽어가고 있잖아요.

-대체 무슨 소리야?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는데

아빤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요.

양말을 뒤집어도 바지를 털어도 모래투성이다

아이는 매일 모래를 묻혀 들어온다

그리고 모래알보다 많은 걸 배워서 들어온다

사람은 죽어가는 게 아니야,

살아가는 거야,

하지만 나는 밥을 안치면서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66면, 「황사 속에서」 부분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게 키우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 그러나 밖에 나갔다 온 아이는 세상의 더러운 면도 보고 지저분한 말도 듣는다. "모래를 묻혀 들어온" 저 아이가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될까 부모는 "양말을 뒤집어도 바지를 털어도" 보지만, 완벽히 털어낼 수는 없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는 당연한 비극도, 아직은 아이가 몰랐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바람. 그러나 아이는 "모래알보다 많은 걸 배워서 들어온다".

그 비감(悲感)을 이 시는 표현하려 했겠다. 그러나 그 심정, 직접 느껴보지 않았다면 어찌 알겠는가. 이 시를 읽는 것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시는 참 잘 쓰였지만, 저 순간의 진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완벽하게 정확하지 않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에게 사람은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화자는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언어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표현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언어는 무력하다. 그래서 이 시는 실패다. 다른 모든 시가 그렇듯이 이 시 역시, 실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것인가? 언어가 진실을 정확히 담도록 하는 그 불가능한 일을, 우리는 포기해도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다, 반대로 말하자. 그 불가능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말로 시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시인이 아니고, 잘 알면서도 계속 쓰는 이가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언제나 실패하고, 기꺼이 실패한다. 자신이 실패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 실패한다. 그들의 글은 그 실패의 흔적이고, 시란 실패의 기록이다.

시인 나희덕은 작년에 아홉 번째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이 91년도에 출간되었으니 대략 3-4년에 한 번꼴로 시집을 내 온 셈이다. 그 꾸준함이 나는 경이롭다. 삼십 년이 넘도록 쉬지도 않고 거듭 실패해온 셈,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아마 몇 년 후에는 열 번째 시집으로 또 우리를 찾아오겠다. 그녀는 또 쓰고 또 쓸 것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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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뭐****지 | 2022.04.30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5년 전 김민정 시인의 트위터를 보고 호기롭게 펼쳐봤던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가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로 새 옷을 입고 출간됐다. 이번에도 역시나 김민정 시인의 영향을 넘치게 받으며 다시 읽어보게 됐다. 하나의 트윗은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뿐만 아니라 김소진 작가의 작품들까지 독서 위시리스트를 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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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김민정 시인의 트위터를 보고 호기롭게 펼쳐봤던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가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로 새 옷을 입고 출간됐다. 이번에도 역시나 김민정 시인의 영향을 넘치게 받으며 다시 읽어보게 됐다. 하나의 트윗은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뿐만 아니라 김소진 작가의 작품들까지 독서 위시리스트를 채워줬지만 독서 리스트로 완벽히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곳이 멀지 않다』의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오랫동안 깜빡하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움이 반, 나에게 있어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김소진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아쉬움이 반 밀려왔다.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p.18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시집을 처음 읽었던 5년 전도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봄이 완연했고 다양한 색채로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그에 어울리는 플레이 리스트를 채웠었다. 봄의 감성을 충만히 누리는 와중에 시집을 챙겨 읽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때 들었던 플레이 리스트와 요즘 챙겨듣는 플레이 리스트가 크게 차이 나지 않고 그때 독서 노트에 옮겨 적었던 구절과 지금 읽으며 인덱스를 붙인 구절도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 와중에 시집을 챙겨 읽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 모든 게 다 김민정 시인 덕분이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p.55 「속리산에서」 

 

나희덕 시인은 개정판 시인의 말에서 인생의 시기마다 그때에만 쓸 수 있는 시가 있어 서투른 대목이 눈에 띄어도 덧칠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문득 지금 이 시기에 쓰고 있는 시인의 시들이 궁금해진다. 창작자에게 인생의 시기마다 그때에만 쓸 수 있는 작품이 있듯이 독자들에게도 어느 시절에 꼭 챙겨 읽어야 하는 그런 작품들이 있다. 이 시기에 내가 놓치고 있는 작품들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번에야말로 김소진 작가의 작품들을 챙겨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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