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글이란 어떤 문화에서는 신성한 것이지만 어떤 문화에서는 위험한 것이다. 고대이집트에서는 글의 발명이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되는 한편으로 글의 해악이 크게 염려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파이드로스』에는 글이 사람들에게 기억 연습을 게을리하게 해서 결국 건망증이 심해지게 만들고, 게다가 무지함에도 유식한 척하며 거짓 지혜를 늘리게 한다고 경고한 이집트 현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를 파이드로스에게 들려준 소크라테스는 글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말이 없다는 것. 글은 그림과 같아서 언제나 같은 것을 가리키고 사람들의 물음에 대해 침묵하기에 영혼이 살아 있는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그와 정반대로 말이 많다는 것. 적당한 사람, 부적당한 사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읽혀 오용과 모욕을 당한다는 것. 그러니 글은 아버지 없는 아이와 같다.
--- 「문학적 동물들의 아나키즘―최윤, 「회색 눈사람」」 중에서
기자를 한사코 단념하려고 하는 동시에 열렬히 그리워하는 그녀의 심리를 서술자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슬픈 육체”와 “불안한” 마음의 접경에서 움직이는 그 심리는 충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프로이트는 모든 심리 활동을 주동하는 에너지의 원천인 이 충동을 정신생활에 가해진 신체의 요구라고 보았다. 라캉 이후 널리 통하는 욕망과 충동의 구분에 따르면 그녀의 심정은 욕망보다 충동에 확실히 가깝다. 모호한 요약의 잘못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욕망과 충동의 차이는 법 혹은 상징계의 질서에 대한 관계에서의 차이다. (중략) 사진기자가 “여자 킬러”라는 귀띔을 받았음에도, 자신에게 다시 다가온 “슬픔”이란 운명임을 직감했음에도 그녀는 충동의 압력을 피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직장을 마주 보고 있는 찻집의 커다란 유리창 앞에 자리를 잡고 그에게 다시 자신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 「여성의 슬픈 향유?―신경숙, 「배드민턴 치는 여자」」 중에서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은 어느 시대의 문학적, 철학적 인간학에나 나타나는 제재이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서 동물 같은 인간의 출현은 의미 있는 사건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동시대를 한동안 풍미한 역사철학적 담론과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듯이, 1989년 베를린장벽 철거와 함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면서 한국의 사상계에도 주목할 만한 기류가 나타났다. 전후 냉전 질서가 붕괴했다는 생각은 물론, 보다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어떤 대전환을 인류가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그러한 생각을 분절하기 위해 부활된 혹은 창안된 개념들이 유행을 보았다. 그 개념 중 하나가 헤겔로부터 유래한 ‘역사의 종언’이다.
--- 「동물화한 인간의 유물론적 윤리 - 은희경, 「내가 살았던 집」」 중에서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는, 앞에서 보았듯이, 자연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 타산과 계략에 서툰 “멍청한” 사람들 사이에 성립하는 우정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우정은 기업주의나 소비주의 풍조에 휘말린 우정과 다르다. 기업을 경영하듯 타인과 교제하는 사람에게 친구란 앞으로 이득을 가져다줄 투자 대상이고, 소비생활의 일종으로 인간관계를 영위하는 사람에게 친구는 한때의 쾌락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공자나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되는 교훈에 따르면, 진짜 우정은 그러한 기업주의적 이용이나 소비주의적 향락과 관계가 없다.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 타인의 인격 전체에 대한 경애, 함께 살아온 시간에 뿌리박은 공감과 소통 등을 특징으로 하는 우정을 상정하고, 거기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연대의 정치를 위한 테마, 훈육, 동기를 보고 있다.
--- 「순진한 사람들의 카니발적 공동체 - 윤성희,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 중에서
디디와 도도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따라 형성된 노동계급 문화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노동자라는 계급적 정체성이 의미 있는 뭔가를 이룬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이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보다 가난하다는 사실이다. 디디가 비비한테서 빌린 책을 훑어보는 장면에서 그녀는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다가 도표 하나가 눈에 들어오자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소득과 직업으로 따져본 수명에 관한 통계라는 설명이 붙은 도표”다. 그 도표의 요지인즉 “돈이 있으면 더 살고 돈이 없으면 덜 산”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날 종일 돈에 대해 생각했다고 도도에게 말한다. 식탁에 마주 앉은 그는 그는 자신 역시 “돈이 없구나”라고 항상 생각한다고 대꾸한다. 그녀는 책을 통해 접한 돈과 수명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그는 “그건 그렇지”라고 응답하고 그녀는 곧바로 “그게 그런가”라고 묻는다.
--- 「미니멀리즘, 아이의 마음, 코뮌주의―황정은, 「디디의 우산」」 중에서
「봄밤」의 영경은 위태로운 몸이다. 그녀는 수환을 처음 만난 40대부터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몰골이었고, 요양원에 거주하는 동안 영양실조 상태에서 경련, 발작 등의 알코올 금단증상을 보였으며, 수환과 사별한 다음에는 치매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병든 몸이 아니다. 그녀의 몸은 자신이 낳은 아이의 상실,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고립, 남편의 임박한 죽음을 견뎌온 몸이고,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부과한 윤리적 엄명에 따라 버텨온 몸이다. 그래서 병의 형태로 나타난 그녀의 고통은 비극 중의 고통이 대개 그렇듯이 강렬하고 고양된 삶의 표시가 된다. 그녀가 김수영의 시구를 절규하듯 음송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문득 고귀한 수난자의 풍모를 띤다.
--- 「비극적 파토스의 민주화―권여선, 「봄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