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Philippi)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마케도니아 필립”의 이름을 본뜬 지명이다. 이곳은 마케도니아 동쪽 끝에 있는 지역으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첫째가는 성읍”(행 16:12)이었다. “로마의 식민지”(행 16:12)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주민들은 세금과 조공을 바치는 것 외에는 그다지 큰 제약을 받지 않았고, 심지어 땅을 소유할 권리도 갖고 있었다. 로마 출신의 사람들이 그리스 출신의 사람들보다 수적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법과 제도로 통치되는 도시였기에 “작은 로마”로 불리기도 했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얻은 첫 열매였다. 바울이 빌립보를 처음 방문하게 된 것은 “제2차 선교 여행 때”였는데(행 16장, A.D. 52년경), 당시 성령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시고 유럽으로 방향을 바꾸게 하셨다. 그런 중에 트로아로 내려온 바울에게 “우리를 도와 달라”고 말하는 어떤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 주셨고(행 16:8-10), 이와 같은 섭리적인 인도하심 속에 바울은 빌립보를 방문하게 된다. 한편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성읍 밖에 있는 강가에서 기도 모임으로 사역을 시작했다(행 16:13). 그 무렵 강가로 모여든 여인들 가운데 자주 옷감 장수였던 “루디아”를 만났고, 그녀와 그녀의 집안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믿고 구원받은 후 침례에 순종했다(행 16:14,15).
또한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나갔다가 점치는 영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를 감옥에 가두었다(행 16:16-24). 하지만 그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는 찬송했고, 하나님께서는 큰 지진을 일으키셔서 감옥 문을 열어 주셨다. 이런 와중에 “빌립보 간수”가 구원받고 침례를 받았다. 그의
모든 집안 역시 구원받고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형성되었으며, 이후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 때 다시 빌립보를 방문했다(행 20:1-6, A.D. 60년경).
당시 빌립보 교회는 매우 “모범적인 교회”로서 바울이 좋아하는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빌 1:4,5). 그들에게는 신실과 사랑, 주님을 향한 열정 등 본이 될 만한 증거들이 많이 있었다. 이는 그 교회가 박해 속에서 전파된 말씀을 통해 세워진 교회였기 때문이다. 즉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빌립보 교회가 신실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준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육신적인 모습으로 인해 바울이 책망했던 “고린도 교회”나 은혜의 복음 가운데 잘 달려가던 길에서 벗어난 모습 때문에 바울이 바로잡아 주어야 했던 “갈라디아의 교회들”과는 달랐다. “교리적으로” 매우 건전했으며 교회의 “규범”이나 “실행” 면에서도 모범적이었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그곳을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에서 그를 한두 번 도왔다(빌 4:16). 갈라디아의 교회들처럼 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아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와 관련하여 혼란을 느끼거나 갈등을 겪지도 않았다. 몇 가지 개인적인 문제들(빌 4:2, 유오디아와 순두케 간의 갈등)과 종종 다가오는 유대주의자들의 공격(빌 3:2)을 제외하고는 고린도 교회처럼 죽음이나 부활 및 불멸에 대한 문제도 없었다. 그야말로 참된 신약 지역 교회의 올바른 모습을 지닌 교회였다.
빌립보서는 “A.D. 63-65년경”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빌 1:1,2) “옥중 서신”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두 번” 투옥되었다. 첫 번째 투옥된 것은 사도행전 28장에서였는데(A.D. 63-65년경), 이때 “네 권”의 옥중 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 기록되었다. 당시 바울은 지하 감옥이 아닌 “가택 구금” 상태였고(행 28:30), 함께할 수 있는 동료들도 주변에 있었다(행 28:17-31, 빌 1:13,14, 골 4:10-14). 누구든지 바울을 만나러 올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웠으며, 바울은 곧 풀려나리라는 기대까지도
하고 있었다(빌 1:25,26; 2:24).
한편 바울은 그 이후에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두 번째로 투옥되었는데(A.D. 68년경), 이때에 마지막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디모데후서가 기록되었다. 당시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첫 번째 투옥 때처럼 자유롭지 못했으며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순교의 죽음을 통해 “제물로 들려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며(딤후 4:6), 더욱이 그의 동료들은 바울 곁을 떠난지라 그 자리에 없기까지 했다(딤후 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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