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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나는 어느 날 죽은 이의 결혼식을 보러 갔습니다 /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 어느 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 그 밤에 붉은 꽃에 / 늙은 들개 같은 외투를 입고 / 늙은 새는 날아간다 /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 /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 / 안개와 해 사이 / 그러나 지나가는 세월도 / 어느 날 애인들은 /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2부 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 내 마을 저자에는 주단집, 포목집, 바느질집이 있고 / 맑은 전등 /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 / 그 옛날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 미술관 앞에 노인들은 물 흐르듯 앉아 / 아이가 달아난다 / 두렵지 않다, 그러나 말하자면 두렵다 / 흑백사진 한 장 / 검은 노래 / 청아한 가을 / 붉은 노래 3부 바다가 / 나의 고아들은 /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 부풀어오르는 어머니 / 해는 뜨겁고 / 붉은 조개를 단 거북 / 동천으로 / 성(聖) 숲 / 꿈, 불 / 여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 옛사랑 속에는 전장의 별들이 / 몽골리안 텐트 / 모르고 모르고 / 이 지상에는 4부 우연한 나의 / 누런 달 아래 있는 놀이터 / 비행기는 추락하고 / 폭발하니 토끼야! / 숨은 사랑 / 우리들의 저녁식사 / 눈 안의 눈 / 갑자기 생긴 길 / 오후 두시경 / 어느 눈 덮인 마을에 추운 아이 하나가 / 숨 / 청동 염소 / 물빛 |
저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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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 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 「어느 날 애인들은」 중에서 |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_「바다가」 부분 시인은 1964년 오래된 도시 진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1992년 늦가을 독일로 가 더 오래된 도시, 폐허가 된 옛 도시들을 발굴하며 살았다. 그곳에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사무치게 알았다”. 이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는 그가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공부하고, 발굴하고,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을 살아내며 8년에 걸쳐 묶은 시집이다. 뿌리를 뽑고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서 자라나는 뿌리마저 제 손으로 자르며 날아가는 나무도 별 달을 거쳐 수직도 수평도 아닌 채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 집을 이루고 또 금방, 집 아닌 줄 알고 날아가리라 _「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전문 한국을 떠나 독일로, 발굴을 위해 시리아와 터키를 오가며 시인은 “몸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으로” 다양한 세계를 만났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도시와 되살아나는 역사 사이에서 시인은 태어남과 죽음을, 광막함과 외로움을 본다. 선연한 것은 전쟁과 폭력이 남긴 핏자국이다. 전쟁을 피해 왔다는 전철 속 가수의 입안으로 여전히 탱크가 지나가고(「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 국경을 지나는 사람들 앞에 “탱크는 길을 파고 비행기는 길을 막는다”. 사람들이 제 목을 자르며 들어간 차가운 땅속(「늙은 새는 날아간다」), 시인이자 고고학자였던 그가 발굴한 것은 폭력의 유구함이자 문명의 한계, 유한성에 대한 예감이기도 하다. 머리가 둘 달린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나 성안 마을을 돌아다니고 머리는 하나이고 몸을 둘인 아이들은 술청에 앉아 오래된 노래를 부른다 검은 군인들이 일으킨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둘인 몸은 서로를 껴안고 하나뿐인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오 오 어느 날 가버린 사람들은 별이 되었을까, 오래된 노래는 성안 마을 시궁을 흐르고 시궁에서는 먹가슴 같은 물이 흘러 노을은 지나다가 가끔 멈추어 서서 피곤한 얼굴을 씻는데 _「붉은 노래」 부분 낯선 땅에서 시인은 썼다. 쐐기문자부터 라틴어, 고대 중국어, 수메르어 등 잊혀가는 여러 말들을 익히고 읽고 되새기면서도, 오직 ‘한국어라는 바다에만 머물며’ 시를 썼다. 닿지 않으리라는 불안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쌓아올린 외로움의 집에서 시인은 시인 자신을 썼다.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어느 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어느 날 애인들은」),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을 알면서(「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시인은 멈추지 않고 썼다. 편지가 든 가방만 과수원 나무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어느 날 거기서 “오래된 문자로 쓰인 편지가 지상으로 떨어”질 것임을, “누군가 공장의 그늘 아래에 멈추어 서서 늙은 연인에게서 온 편지를 읽”을 것임을(「그 옛날 공장은 삶은 과일들의 자궁」) 믿었다. 고독과 절망 속으로 들어가되 기어이 맨눈으로 버티어서 보았고, 죽음을 향해 떠내려가는 말들을 붙잡아 썼다. 그날의 일기 속에는 불안 같은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 너의 품을 빠져나온 오랫동안 잠을 잔 혀는 아이들의 머리에 매달린 흰 꽃에 입을 맞추고 흐르는 불처럼 창밖 너머 펼쳐진 숲을 건넌다 오 오,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너의 품속에서 새로운 생을 끄집어내듯 나는 아프다 오 오 새로운 지문의 날들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때 너는 일기를 다시 쓰고 일기장 속에서 오래된 시간은 잠든다 오래된 시간은 얼마나 고요히 우리를 예언했던가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이 순한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것을 오래된 시간은 얼마나 고요히 예언하고 있었던가 _「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전문 투병중이던 2018년, 개정판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난다)를 위한 자신의 약력을 정리하며 그는 이런 말을 둔다.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시인이 남긴 여섯 권의 시집 중 한 편이다. 생전 그는 세 권의 산문집, 세 편의 장편소설, 두 권의 동화책을 펴냈고, 2018년 10월 3일 우리 곁을 떠나며 세 편의 유고집을 남겼다. 어느 오래된 영혼이 머물다 간 시간, 우리에게 남은 것이 이토록 많다. 왜 사람들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편지를 쓰는가 왜 삶보다 사랑은 더 어려운가 왜 저 배우는 유럽의 어느 지하도, 더러운 하수장에서 죽어가면서도 하수도를 따라 떠내려가는 편지를 잡으려고 하는가 _「내 마을 저자에는 주단집, 포목집, 바느질집이 있고」 부분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 시인의 말 8년 만에 시집을 묶으면서 8년 전에 썼던 시들을 다시 읽어본다.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이었다. 가만히 내가 움직인 길을 살펴본다. 고향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독일로 발굴을 하느라 시리아로 터키로. 몸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으로 나는 다양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낯선 종교와 정치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나라는 한 사람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한국인이라는 나와 나라는 나, 그 사이에 섬처럼 떠돌아다니던 시간들. 그러나 시를 쓰는 나는 한국어라는 바다에서만 머물고 있었다. 어머니, 다른 식구, 그리고 벗들. 그들의 인내를 파먹고 살았던 독일 체류 기간 동안 나는 이제 더이상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하지 않는 지혜를 배우고 있다. 내가 나를,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살아갈 것이다. 2001년 1월 허수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