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이 근처를 일컬어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리에 뻗쳐 있으며, 법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福地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만한 지역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사자산은 높이가 1,150m로 법흥사를 처음 세울 때 어느 도승이 사자를 타고 온 산이라고 한다.
산삼과 옻나무, 그리고 가물었을 때 식량으로 사용한다는 흰 진흙과 꿀이 있는 그래서 네 가지 보물이 있는 산인 즉 ‘사재산四財山’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이 사자산이다. 이 산에 신라 때의 고승 자장율사가 지은 절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 한 곳인 법흥사가 있다.
---「강원도 영월군 법흥사 아랫마을 대촌」중에서
“무릇 주택지住宅地에 있어서, 평탄한데 사는 것이 가장 좋고, 4면이 높고 중앙이 낮은데, 살면 처음에는 부富하고 뒤에는 가난해진다.”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지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실린 글과 같이 평지에 자리 잡은 닭실마을이 있는 봉화는 경북 지방에서도 가장 오진 곳 중의 한 곳이다. 이렇게 외지고 구석진 곳이지만 나가고자 하면 중앙고속도로나 태백 방향으로 난 길이 많다.
하지만 조용한 곳, 산천의 경치가 좋고 인심 좋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제가 아무리 화려한 것이라도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제가 아무리 시끄럽게 굴더라도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수도修道하는 사람은, 입산을 할 때는 오직 그곳이 깊은 곳이 아닐까 걱정하며, 숲에 들어갈 때는 오직 은밀한 곳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명나라 사람인 오종선吳從先이 지은 《소창청기小窓淸紀》에 실린 글처럼 마음을 비우고 들어가 나날을 보낼만한 곳이 봉화의 유곡마을이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닭실마을과 청암정」중에서
나라 안의 여느 민속마을처럼 드러낼 만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은 많지 않지만, 옛 멋이 그대로 남아 한가롭고 포근함을 주는 곳이 한개마을이다. 퇴락해서 바라보기가 조금은 안쓰럽지만 분위기가 있는 한주정사에서 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다가 휘적휘적 고샅길을 걸어 내려오는 길에 마음에 두었던 그리운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으랴?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의 한개마을」중에서
수송대 앞의 냇가에 있는 거북을 닮은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짓고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암구대 옆 물가에는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이곳을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냇물 건너편 언덕에는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지금 남은 요수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80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자연 속에 살던 그에게 반가운 기별이 왔는데, 아랫마을인 영송마을 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이튿날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인 이황李滉(1501~1570)이 찾아오겠다는 전갈이었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薑川里 수승대와 동계 정온」중에서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이행李荇(1478~1534)은 자신의 사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편안하고 한가함이 약이 되고, 잎이 피고 지는 것에 봄과 가을을 안다. 멀리 알리거니와 산중의 객客인 나는 길이 그러한 가운데에서 살아왔다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 ‘산천山川조’에서 김희경金希鏡은 “물이 굽이치고 산이 감돌아서 네 마을을 이웃했다.”고 노래했고, “봄 산이 그림같이 이름난 마을 안았는데, 열 집 민가民家에는 문을 달지 않았다.”고 조선 전기의 문신 김효정金孝貞(1383~?)이 묘사했던 곳이 산청이다. 이 산청의 웅석봉 아래에 자리 잡은 단속사 터 부근에 집 한 채 짓고서 건너편에 있는 석대산(534m) 아래 펼쳐진 산자락들을 바라보며 “아 참 바람이 좋다 싶어” “아 참 햇볕이 좋다 싶어”라고 김광석의 〈나른한 오후〉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산다면 마음이 얼마나 가쁜 할까?
---「경남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 터 삼층석탑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운리」중에서
푸른 바다와 수많은 돌들이 섞이고 섞여 조화를 이루는 금산 아래에 그림 같은 상주해수욕장이 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과 하얀 모래사장이 절묘한 아름다움을 빗어내는 상주해수욕장은 어쩌면 나라 안의 해수욕장 중에 동해의 장호해수욕장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의 첫째 둘째를 다툴지도 모른다. 남해 금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반월형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상주해수욕장의 방풍림인 소나무 숲은 오래전에 우리나라 남해안을 초토화시켰던 태풍 ‘매미’와 ‘루사’에도 끄떡하지 않아서 남해안 여러 항구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하나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성인은 만물과 같이 살면서 만물을 해치지 않는다. 따라서 만물도 그를 해치지 않는다. 오직 자연에 순응하면서 만물을 헤치지 않는 자만이 사람들과 더불어 보내고 맞이할 수가 있다”. 공자의 말처럼 자연에 순응하고 그 자연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경남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중에서
통영의 한산도에서 전라남도 여수에까지 이르는 뱃길이 한려수도이고, 그 뱃길이 이 나라에서 남국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뱃길이다. 뿐만 아니라 통영 일대는 기상청의 통계에 의하면 한 해 365일에서 250일쯤이 맑기 때문에 가장 날씨가 좋은 지방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 후기 삼도수군 통제영의 통제사로 와 있던 벼슬아치가 정승으로 벼슬이 올라 이곳을 떠나게 된 것을 섭섭히 여겨 “강구안 파래야, 대구, 복장어 쌈아, 날씨 맑고 물 좋은 너를 두고 정승길이 웬 말이냐”라고 탄식하였고, 일제 때에는 이곳의 풍부한 수산물과 좋은 날씨에 반해서 많은 일본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고 한다.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중에서
우도항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보는 성산포는 섬이 아니지만 제주도에서 떨어진 섬 같이 보인다. 섬에서 보면 섬이 되는 성산포로 가는 바다는 잠잠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산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항상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할 듯 일렁이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섬 아닌 성산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산다면 얼마나 가슴이 후련할까?
---「제주도 북제주군 성산 일출봉 아래 성산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