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역사 교과서 파동이 일단락된 다음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역사 전쟁’으로 인한 사회갈등의 해소를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국정화 이후의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학회와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열었으며,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는 역사 갈등을 역사교육의 발전적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개별 학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글들도 다수 발표되었다. 역사 갈등이 주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만큼, 그 해소 방안도 학교 역사교육을 대상으로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대통령 기념관이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건립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사 갈등은 학교 역사교육뿐 아니라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교육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따라서 현대사 갈등의 해소를 위한 역사교육의 방안은 학교뿐 아니라 사회에서의 역사교육에도 적용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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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사건의 발단이 되는 ?현대화와 역사 교과서?는 중산대학(中山大學) 철학과 교수였던 위안웨이스(袁偉時)가 쓴 글이다. …… 그의 근현대사 해석은 ≪빙점≫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중국공산당의 주류적 역사해석과 달랐다. …… 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이 학술적 견해의 하나로서 용인되었으나 역사 교과서 등으로 대표되는 공식적 역사 인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즉, 태평천국이나 의화단 등 민중운동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교과서의 인식이 대중의 일반적 역사관이라고 할 때, 위안웨이스의 글이 대중을 독자로 하는 지면에 실릴 경우 인식이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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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일본의 현으로 편성된 이래 지금까지 인간의 존엄과 공생, 평화라는 지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오키나와는 독립 왕국에서 일본의 영토로,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13년간 미군의 점령 아래 있다가 다시 일본에 반환된 섬,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기지의 섬, 강대국의 군사적 대결의 장소로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지역이다(아라사키 모리테루, 2016). 오키나와 주민들은 지금도 여전히 본토 일본인으로부터 차별과 소외를 받고, 주둔해 있는 미군 병사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해석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사건은 태평양전쟁기 오키나와 전투 기간에 일어난 오키나와 민간인 희생, 이른바 집단자결이 대표적이다. 오키나와 전투 시기 민간인 희생과 그에 대한 해석은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 기억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자국의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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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정부는 악참(2007)이 터키 민족주의를 인종차별주의라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면서 1913년 발칸전쟁 이후 터키 민족주의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터키 민족주의는 애국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MFAd, n.d.). 터키 역사교육의 목적이 애국심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강조한 것은 직접 역사 만들기에 뛰어든 터키 정부의 일관된 법적·정책적 기조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 p.151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노예제는 이미 옛일이 되었지만, 노예제 당시 자행된 잔혹하고 야만적인 폭력과 비인간적 멸시는 새롭게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반복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온갖 사이비 과학적 인종주의 이론과 ‘무주지(terra nullius) 선점론’의 요람이기도 했다(망스롱, 2013: 169~199, 269~277; 이재원, 2010; 2011). ……이렇게 프랑스의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역사, 이른바 ‘식민지 사실(fait colonial)’에 대한 역사교육은 인권과 민주주의 및 역사 화해와 관련해 중요한 주제를 이룰 수 있다.
--- p.171
독일 역사 교과서의 헤레로 전쟁 서술이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논쟁성 원칙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절반의 이행’이라는 유보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사죄와 배상이라는 정치적 논제가 분석한 최근 교과서에서 빠짐없이 다루어지고 있는 데 비해, 적어도 현재까지는 ‘독일의 특수한 길’ 대 ‘식민주의의 보편사’라는 학문적 논쟁을 직접 다룬 역사 교과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제노사이드를 공통분모로 하는 홀로코스트나 전 지구적 식민주의의 폐해에 대한 논의는 헤레로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의 역사와 현재와의 관계를 성찰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 p.226
원주민에 대한 지위와 인식은 여전히 혼미하고 이중적이다. 사과라는 행위를 사이에 두고 캐나다인과 원주민은 분명 동질 집단이 아닌 이질 집단으로 존재한다. 기숙학교라는 과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화의 명분이 폭력을 가했으므로 해결의 시작은 동화를 비판하고 양자의 구분으로 출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말미에서는 ‘원주민(원문은 aboriginal people)과 다른 캐나다인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하고 이 사과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강한 캐나다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언급해 원주민을 캐나다라는 공동체 구성원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표현은, 정착자 식민주의라는 캐나다의 특성상 피식민 대상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방식의 탈식민주의를 채택할 수 없는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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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에 의해 집단학살이 일어나던 와중에 시크교 청년이 무슬림 소녀를 데려가서(납치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 소녀는 살해당한 부모와 이전 생활에 대한 기억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분립 과정에서 납치된 여성들이 국경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믿고 그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데 합의했다. 납치 여성에 대한 조사와 추적이 시작되었고 이 한 쌍은 경찰들의 탐색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결국 그 무슬림 소녀는 병을 얻어 사망했다. 남편은 경찰이 그녀를 빼앗아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병원에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NCERT, 2007: 395)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끝에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왜 납치된 여성들을 교환하는 데 동의했을까? 이것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토론으로 발전시킨다.
--- p.287
먼저 증언서사의 진실 공방과 논쟁은 비극적인 역사를 어떻게 기술하고 전승할 것인가, 그리고 사실의 진위 여부를 어떻게 판별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학과 역사교육 분야의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증언의 진위를 놓고 상반된 주장들이 엇갈린 멘추-스톨 논쟁은 정치적 성격을 띤 폭로로 확대되었고 단판에 그치지 않음으로써 21세기에 접어들어 한국 사회에서 불거진 근현대사 해석 논란과 유사한 궤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멘추-스톨 논쟁과 한국 사회의 논란에서 보듯이 흔히 현대사란 ‘객관적 진술’이라기보다 일종의 “기억의 시학”이며 정치적·이념적 준거틀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점, 일방적 강권이나 장악의 권역(圈域)이 아니라 오랫동안 다양한 의견들의 경합이 펼쳐질 수밖에 없는 공공 영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p.328
2010년대 보수당 정부는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선언하고 근본적인 영국적 가치 정책을 통해 극단주의 예방과 사회통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어맨다 케디(Amanda Keddie)는 이러한 정책을 “영국적인 것을 기반으로 핵심 정체성을 견고하게 세움으로써 사회 화합을 강화하는 시민 재균형 어젠다(civic rebalancing agenda)를 반영한 것”(Keddie, 2014: 540)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 공동체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재가 공통의 정체성과 가치의 공유를 저해해 왔으며, 따라서 공통된 가치 교육을 통해 공동체들 간의 화합과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서는 시민교육을 재편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인종 문제를 연구하는 비니 랜더(Vini Lander)는……시민 내셔널리즘 담론이 다원성에 기초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종교정체성과 시민 내셔널리즘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구분하여 무슬림을 테러를 자행하는 타자로 배제한다고 비판했다.
--- p.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