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본이 나오기 전에는 기억이 일상생활과 신비주의 학문을 지배했으며, 또한 ‘모든 기술을 보존하는 기술’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개개인이나 공동체의 기억력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식을 전달했다. 수천 년 동안 개인의 기억은 오락과 정보, 기술의 영구 보존과 완성, 상업의 관례, 여러 직업의 수행 등을 관리하는 수단이 되었다. 사람들은 기억에 의해서, 그리고 기억 속에서 교육의 결실을 수확하고 보존하며 저장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을 연결시켰던 라틴어는 각국의 지식인들과 민중 사이의 장벽이 되었다. 집이나 시장에서, 그리고 대중의 유흥에서 쓰는 말은 전혀 다른 언어였다.
유럽에서는 인쇄술의 등장이 가동 금속활자로 인쇄하는 활판인쇄술을 의미했다. 중국과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목판인쇄가 중요한 발명이었으므로 인쇄술의 등장은 목판으로 인쇄하는 목판인쇄술을 의미했다. 따라서 서양의 ‘인쇄’와 동양의 ‘인쇄’를 같은 의미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쇄된 책의 승리는 곧 대중 언어의 승리를 불러일으켰고, 이 대중 언어는 유럽 전체의 지식 언어가 되었다. 인쇄된 지역어 문헌은 전혀 다른 2가지 사고방식을 형성하게 했다. 즉 민주화를 실현하면서도 지방화도 이루었다.
---「13부 지식 공동체의 확대」중에서
서구의 위대한 종교도 반복되는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정반대의 길을 찾아냈다. 힌두교와 불교는 역사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한 데 반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역사 속으로 향하는 길을 추구했다. 경험에서 도피하는 약속 대신에 경험에서 의미를 찾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둘 다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이 세 종교는 모두 윤회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옮겨 가는 극적인 전환을 보여 주었다.
과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빙켈만은 탐구자라기보다 발견자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유럽에 고대 문명의 매력에 눈을 뜨게 해 주었으나 자신은 그저 희미하게 보았을 뿐이다. 빙켈만은 다른 사람들을 탐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유도했다. “내가 고고학을 위해 발견한 것은 완전히 새로우며 예상하지 못한 세계이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시대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은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는 놀라울 수 있다. 그렇지만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무의미한 듯 보였다. 역사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전에도 무슨 일이 정말 일어났던 것일까? 19세기 중반까지도 ‘선사시대’라는 말은 유럽어에 없었다. 그동안 생각이 깊은 유럽인들은 어쨌든 그들의 역사적 시야에서 지구의 과거를 대부분 제외하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1818-1883년)는 국가들이 일어나고, 식민지가 늘어나고, 공장이 확대되며,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는 애덤 스미스, 제임스 와트, 토머스 제퍼슨 등이 활동했던 세기의 말기에 성장했다. 그는 당시에 서유럽에서 극적으로 폭발하고 있던 생산력 속에서 과거의 숨겨진 차원을 발견했다.
---「14부 과거를 드러내다」중에서
그러나 교양 있는 유럽인들은 마침내 ‘고전적’이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을 벗어나 전 세계가 문명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케인스가 일깨워 주는 영향력은 다른 학문의 중요한 사상가들의 영향력처럼, 그의 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케인스가 내세운 경제의 총수요라는 개념과 정부의 개입에 관한 제안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민소득에 관한 더 완전하고 정확한 통계를 수집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케인스의 끊임없이 빛나는 정신과 경제계의 인간 역할에 대한 생각이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경제계의 첫 번째 정통성에서 구해 낸 사실이었다.
20세기에, 공적인 통계 수치는 국민 복지와 국제관계의 토론을 지배하게 되었다. 국민소득이나 1인당 소득, 국민총생산, 성장과 발전 속도, 선진국과 후진국, 인구 증가 등의 개념들은 케틀레와 그의 제자들이 물려 준 유산이었다.
원자의 신비는 20세기를 괴롭혔다. 2,000년 동안 ‘원자’는 철학자들의 관심사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주제였다. 원자의 어원인 그리스어 ‘atomos’는 물질의 최소 단위를 의미했으며, 더는 쪼갤 수 없는 입자라고 여겨졌다. 이제 원자는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고 전례가 없는 위협과 약속이 되었다.
---「15부 현재를 조사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