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서 독자들이 ‘인지적 종결 욕구’에 빠지지 않기를 당부드린다. …… 우리의 뇌가 어떤 사안에 대해 복잡한 정보를 대량으로 접할 때 최종적이고도 확실한, 심플한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하는 욕구를 말한다. 여기엔 ‘빠른 결정’을 원하는 심리가 함께 작용한다. …… 이처럼 어떤 문제나 이슈에 대해 상반되는 팩트와 정보가 쏟아지고 그걸 헤아리는 과정에서의 인지과부하를 뇌가 견디지 못할 때, 사람은 어느 쪽이든 결론을 내려고 한다. 퀴어 이슈도 마찬가지다.
---「머리말」중에서
반동성애 그룹이 교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나는 동성 간 성관계는 성경에서 분명히 죄로 본다는 점을 언급했고, 기독교 신앙의 체계에서 동성결혼이 인정되기 어려운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거나, 동성애가 모든 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동성애에 대해 신학적으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도 존중한다. 그들이 성소수자를 사랑하고 포용하려는 의지는 진실하며, 많은 성소수자들이 혐오와 모욕으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동성애 그룹은 나와 같은 입장에 대해서도 거짓에 타협한다며 비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진리만큼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학문의 영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자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믿음이 틀릴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 ---「1부 5장 ‘반동성애 운동의 문제점’」중에서
단계적으로는 (동성애자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가족을 구성할 수 있도록 우선은 생활동반자법이라는 느슨한 법이 필요하겠지만, 특별히 보다 강한 결속을 원하는 동성애자 커플에게는 이성애 부부와 동일한 수준으로 ‘결혼’의 지위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충분히 상술했듯이, 논란이 많은 차별금지법보다 오히려 이 법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 _187-188쪽, 1부 7장 ‘기독교와 퀴어, 사회적인 공존의 방법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하여’」중에서
‘젠더’라는 가면 안쪽에 가려진 본질적 정체성 같은 것은 없다. 젠더는 고정된 본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행위자가 어떤 젠더를 지니기 때문에 그런 젠더로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재현(再現)이 아니다. 오히려 수행되는 행위를 통해 행위자가 특정한 젠더로 구성된다constructed. …… 물론 성소수자 인권운동 쪽에서는 고정적/본질적/선천적 성정체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강해서 버틀러의 이런 주장들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어차피 젠더가 수행적이라면 반대 젠더를 수행하면서 젠더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_264-265쪽, 2부 2장 ‘버틀러의 퀴어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젠더 트러블》 읽기’」중에서
종합하면 “신화의 감추어진 토대는 성욕이 아니다. 그것은 드러나기 때문에 진정한 토대가 아니다.” 하지만 성욕 역시 욕망의 한 형태로서 모방적 경쟁관계에 놓이기 쉽고 폭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성욕’이 아닌 ‘폭력’의 코드로 읽어야 한다. 라이히의 견해와 달리 ‘성의 해방’은 ‘성관계의 상대를 가리지 않는’, 즉 ‘차이소멸’의 방식으로 나타나며, 결국 이는 폭력을 부추기게 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퀴어의 정치적 기획 역시 ‘인권’의 코드가 아닌 ‘폭력’의 코드로 읽는 시도가 필요하다.
---「2부 3장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퀴어’」중에서
핵심은 진정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도덕/윤리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주체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진정으로 자유롭게 올바르고자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스스로의 도덕적/윤리적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의 진정성과 타인의 진정성 사이의 갈등과 충돌은 필연적이며, 이로부터 나타나는 폭력은 타자를 향하게 된다. …… 즉, 진정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은 현대철학의 주요 테마인 ‘차이’에 대한 인정의 문제로 연결된다.
---「3부 1장 ‘폭력과 진정성, 진정성의 폭력’」중에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 즉, 비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면 부정해버리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사고에 빠지는 것이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지지-반대의 대립적인 이항구도가 형성되면서 이 양상이 결국 이데올로기 간의 전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 이런 이데올로기적 갈등 구도 속에서 양쪽 모두 상대 쪽의 추악한 면만 골라 집중적으로 들춰내고, 극대화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이데올로기의 부정적인 면은 인정하기를 회피/거부하거나 문제를 사소한 것으로 축소한다. …… 일찍이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는 《맹신자들》이란 책에서 이를 간파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중운동이 일어나고 확산되는 데에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절대 안 된다.”
---「3부 4장 ‘희생양의 전체주의’」중에서
만일, 퀴어 앨라이들이 말하듯이 “행위에 대한 반대가 곧 존재에 대한 혐오”라는 논리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기독교의 전통윤리가 혼전 동거나 성관계를 옳지 못한 행위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수많은 비혼 동거커플을 혐오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가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을 주장하며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 자체의 구원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타종교인에 대한 혐오로 규정될 수 있고, 동일한 원리에 의해 무신론자의 신념 역시 종교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 개개인에 대한 혐오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런 논리가 과연 온당한가?
---「3부 4장 ‘희생양의 전체주의’」중에서
나는 1부 끝부분에서 지혜로운 분리주의를 주장했고, 그것의 핵심은 신앙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입각해 올바른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고, 복음과 함께 바른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바른 삶의 양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면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은 그 근간에 자유주의적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자유를 누리려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 동성결혼에 대한 이러한 나의 생각은 아직은 잠정적일 뿐이며, 앞으로 더 많은 고민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보론] 차별금지법인가 동성결혼 합법화인가’」중에서
기독교 내부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퀴어와 젠더가 관련된 갈등이 만연해 있다. 특히 한쪽 입장으로 치우친 책이나 유튜브 영상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과 전쟁을 하도록 부추겨왔다. 세상이 당장에라도 적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이라며, 보는 이들이 진리의 최후 수호자라도 된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전투가 아니라 대화다. 자신의 견해만을 소수로 느끼는 것은 관점에 따른 착시에 불과하다. 급하게 상대방을 때려눕힐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상대의 말을 차분히 듣고 이해한다면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적인 의견을 지녔다고 꼭 혐오자가 아니고, 진보적인 사람이 반드시 악마일 수는 없다. 아쉽게도 이 사실이 정착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이 책이 그 시간을 앞당기는 일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후기 ‘전투가 아니라 대화가 시급하다’(오성민, 유튜브 Damascus TV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