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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는 사나이

예수라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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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426g | 128*190*30mm
ISBN13 9791187295631
ISBN10 118729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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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살해당한 사나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명쾌하게 살해당했다. 그 반역의 정신을 시대의 지배자는 죽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예수를 말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를 껴안음으로써 그 정수(精髓)를 제거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 보기 좋게 성공했다. 체제에 대한 반항아가 암살당하거나 억압당해 가난 속에서 죽어간 뒤, 체제는 그 인물을 위인으로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질서 속에 짜 넣는다.

그 루카 복음서가 묘사하는 상은 확실히 시적이고 아름답다. 밤에 양치기들이 양을 지키며 노숙하고 있는 곳에 천사가 나타나 구세주의 탄생을 알린다. 그러자 홀연 하늘의 군사들이 나타나 대합창을 우주에 울려 퍼지게 한다. 밤을 새워 일하고 있을 때, 우리도 땅바닥에 넙죽 엎드린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구세주가 이런 밤에 어딘가에서 태어나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다 큰 성인이어서는 안 되니까 방금 태어난 아기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해방은 미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미래의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하늘의 군사들의 대합창이 울려 퍼진다면, 게다가 잠에 곯아떨어진 세상에서 보기 싫은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몰래 일어나 일하고 있는 우리한테만 살며시 들려오는 대합창이라면, 우리는 그 꿈의 계시에 행복을 느끼고 예전과 다름없이 평생 넙죽 엎드린 채 일을 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복음서의 전승이라는 것은 이런 예수의 갖가지 발언들을 같은 종류의 것들은 하나로 모으고, 짧은 것은 하나의 언사로 만들어 한 장면에서 발설한 것으로 해서 지극히 짧은 단편 전승으로 정리돼 전해진 것이다. 물론 전승을 모으고 정리한 것은 그리스도교도이기 때문에 거기에 여러 호교론(護敎論)적인 생각, 교조(敎條)적인 선전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각 복음서의 저자들이 그것을 쓸 때 자신의 사상적 관점에서 다듬었다. 본시 하나로 모으고 짧게 정리한다는 것이 이미 극도의 추상화 작업이다. 인간 삶의 무수한 장면들은 짧게 몇 줄로 다듬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의를 하다가, 예수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멘,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겠다.’ 사람들을 상대로 긴 연설을 할 때, 도중에 잠시 말을 끊고 ‘아멘, 나는 분명히 말한다’라며 자세를 가다듬고 결정적인 말을 꺼낸다. 아니 애초에 갑자기 사람들 붙잡아 놓고 ‘아멘,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래 전해져 온 종교적 권위를 앞세우며 점잖게 나중에 살며시 입을 맞춰 아멘하고 찬동하는 그런 화법을 예수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얼마든지 있었다. 소리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이 사회체제 속에서 수탈당하며 살아가노라면 소리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또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덕에 힘이 어느 정도 솟구치면 그것이 소리가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럴 때 어떻게 권위가 실린 발언에 대해서만 살며시 목소리를 합쳐 아멘하고 말해야만 하겠는가. 그건 아니다. 나는 말하겠다. 아멘, 하고 단호하게 말하겠다.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는 결국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역사의 장(場)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한다. 설사 추상적 사상의 언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의 말을 제대로 알아내려면 그 사람이 살고 있던 역사적 장을 봐야 한다. 하물며 예수의 그와 같은 활동을 묘사하려 한다면 이 문제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 예수를 묘사하는 것은 존재의 극히 표층적인 부분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표층의 단순한 나열만으로 시종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소재를 그저 나열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결국 자신이 내면 깊숙이 자각하지 못한 채 지니고 있는 현재의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거기에 투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의 장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으로 예수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한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모습을 거기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식을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결국 체제를 떠받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자신도 모르게 순응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말이 발설된 개개의 장면을 엄밀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그 말이 발설된 전체적인 상황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실제로는 개개의 장면에 대해서도 그것이 빈정거린 것인지, 분노를 폭발시킨 것인지, 분노를 뒤로 감춘 것인지 등은 상당한 정도까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은 이처럼 상황을 향해 발설될 때에는 분명히 하나의 행동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활동 전체도 그 역사적 상황에 맞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는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권력에 의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 반역자였던 것이다. 권력 쪽에서 보자면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사나이였던 것이다. 그 삶과 활동은 생글생글 웃는 분위기 속에 설교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시 그리스도 교단이 사유재산을 포기한 사람들의 금욕적 공동체라고 흔히 통속적인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재산 전부를 교단에 -‘가난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기부한 예외적인 경우가 두세 번쯤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칙적으로 그런 주장이 나온 것은, 그것이 말하자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시각각 그리스도교도로서 생활해 주세요, 라는 정신화한 설교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금욕주의적인 윤리관을 낳았지만, 그 결과는 만일 이것을 진심으로 실천하려 했다면 사람 없는 외딴곳에서 금욕의 수도사와 같은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원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가 이처럼 그럭저럭 실천적인 윤리로 주장하고 있던 것을 정신화해서 ‘계승’한 것이다.

정치 지배자를 국가권력으로 의식한다는 일 따위는 우선 있을 수 없었던 1세기 팔레스티나의 인간을 ‘국가권력의 총체’에 대해 저항한 자인지 아닌지 판정해 보자는 식의 견해는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또 사회의 지배 피지배 구조를 전체적으로 파악해서 그 구조를 뒤엎기 위해 싸운 ‘반체제의 투사’로 예수를 그리려 하는 것도 시대착오다. 그러나 또한 그 반대의 극단으로 치달아 예수는 지배 피지배 구조를 초월한 전인간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역사를 모르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각하든 않든 역사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역사 사회 구조 바깥에 나가서 존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일지라도 지배 체제를 긍정하는 마음이 어떻게 예수한테서 스며 나오는가, 또 거꾸로 직감적인 분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지배 체제의 갖가지 표현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저항했는가, 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살아간 인간 예수를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다. 세리와도 사이좋게 지냈으니까 예수는 로마제국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체제 반체제를 초월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너무 유치해서 어이가 없다.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층은 그 엄밀한 종교적 사회윤리를 통해 사회질서를 지키려 했다. 흔히 이야기하듯 그들, 특히 그 주력을 이루는 바리사이파가 말치레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위선자라는 것은 상당히 왜곡된 상이며, 실제로는 그들 중에 예외도 있겠지만 대부분 엄밀한 종교적 윤리적 실천자였다. 그들을 언행불일치의 위선자로 부르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교 쪽에서 만든 선전, 특히 마태오 복음서 저자들의 선전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도 그들을 위선자라며 비판했으나 그것은 단순히 언행불일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인 이념에 토대를 둔 윤리 행동 자체가 곤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행불일치는커녕, 그런 종교적 지배를 열심히 진지하게 실천하려고 하면 할수록 타인에게는 억압이 돼요, 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라고 예수는 선언했다. 이런 경우는 명백히 객관적 진리는 아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할 리가 없다. 비교적 유복한 나라에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머릿속에서만 성립되는 훌륭한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남아도는 부를 버리고 청빈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가난한 자는 부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서로 도울 줄 안다… 오히려 부나 권력이 있기 때문에 추한 싸움이 일어나고 거짓으로 다져진 인간관계가 만들어지지만, 가난한 자는 그럴 일이 없고 오로지 정직하게 살아간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러니까 가난한 것이 당연히 좋다고 하면 거짓이 될 것이다. 이상을 이야기하자면, 모두가 평등하고 어느 정도 풍요롭게, 그리고 정직하고 친절하게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게 좋다. 가난한 쪽이 인간이 소박해서 좋다는 식으로 큰소리치는 자들은 거의 백 퍼센트 자신은 가난의 밑바닥에서 내일 먹을 빵도 없을지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가난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드럽게 이야기해서 세상의 불공평이 제거되는 일은 거의 없다. 세상 전체가 산술적 합리성을 힘으로 강제해 올 때 거기에 저항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이쪽도 강력하고 단순하게 그것을 되받아치며 주장하지 않으면 강한 충격 효과를 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99가 아니라 1이다. 그렇게 주장할 때 이미 사람은 깊게 전체를 꿰뚫어보는 균형 잡힌 이성을 잃고 있다. 폭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외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종종 있다. 이것 또한 결코 부동의 진리는 아니다. 역설적 반항인 것이다.

유대교는 종교가 아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단지 종교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요소는 그 이데올로기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 유대교는 사회 지배 체제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권위라는 외피를 쓰고 민중의 모든 생활 내용을 일일이 규정한 이데올로기적인 힘이었는데, 동시에 그 이데올로기적 힘을 떠받치는 사회적 내실이 존재했다. 유대교의 주요 담당자인 종교적 상층 계급은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명백하게 지배 계급이었다. 따라서 1세기의 팔레스티나에서 유대교에 대해 저항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만일 그 비판이 근원적인 것이라면- 결코 단순히 ‘진정한’ 종교 신앙을 확립하려는 것도 종교적 윤리의 혁신을 꾀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인간 삶의 ‘근원’ 같은 것에 대한 종교적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없다. 종교적 외피의 비판은 그것이 근원적일 경우 외피를 돌파해서 사회 지배의 구조에 육박한다. 물론 예수가 그 정도까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사회지배 구조와 이데올로기적 외피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이론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것도 실천적으로는 할 수 있다. 예수의 유대교 비판은 근원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사회지배 구조의 아픈 곳까지 찔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임을 당했다.

예수의 이런 발언에는 로마제국 지배에 대한 강한 저항의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는 혁명적인 용자(勇者)는 아니었다는 식으로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1세기 팔레스티나의 변방 시골생활을 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세계 혁명의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으로 상상하는 쪽이 대체로 망상일 것이다. 한편 거꾸로 예수는 이처럼 국가 권력에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순종합시다, 라는 식의 설교를 하는 것도 잘못이다. 학대받는 자들의 신음소리를 설교로 써먹는 것은 얼뜨기 짓으로, 대단히 괘씸한 일이다. 하물며 예수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로마제국의 지배니 거기로부터의 해방이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고, 그런 것을 정색을 하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이다, 예수의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수준의 것과는 다른, 더 ‘근원적’인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철학자인 체하는 종교 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흰 것을 검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이처럼 예수의 비유는 그때마다 교회 속에서 설교로 이용되면서 전해져 온 것으로 생각된다. 복음서에 비유 전승이 매우 많이 전해지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예수 자신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뛰어난 비유의 작가였다는 사정은 있다. 즉흥적으로 연달아 비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유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어서 여러 가지로 다른 상황에 맞추어서 그때마다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예수가 이들 비유로 엄밀하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어떤 상대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지를 모르고서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의 비유를 자신들의 교회적 설교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만 부심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가 어떤 상대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그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즉 비유를 예수의 상황에서 분리시켜 추상적으로 전승했던 것이다.

당파적 진리 주장에서 나온 다른 당파 비판으로는 ‘위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제일 하기 쉽다. 저자들은 입으로는 좋은 이야기를 하지만 결코 실천하지 않아. 이런 경우에 우리는 너무 마태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대 유대 율법학자들, 특히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중에는 율법학자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주장과 행동 사이에 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는 아마도 역사상 대표적인 예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바리사이파의 명예를 회복해 주고, ‘위선자’라는 식의 딱지를 붙인 것을 사죄할 의무 정도는 있을 것이다.

예수의 율법 비판이 때로는 율법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뒤집어엎는 관점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언제나 일관되게 매우 철저한 율법 비판을 계속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예수도 시대의 아들인 것이다. 늘 철저한 율법 비판을 하려고 하면 법이 사회의 지배 구조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논의다. 고대인인 예수에게 법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 정도까지 철저한 분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반발은 직감적 반발이다. 하지만 직감적 반발은 만사의 기초에 있는 큰 힘이다. 이건 이상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 이제 그만둬, 라는 감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유대교 규정 중에서도 안식일의 규정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예수의 비판적인 언동이 여기에까지 미치면 이미 충분히 요주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췄다면 혹시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루살렘 신전 그 자체에까지 비판의 칼날이 향했을 때 이 사나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상의 유대교 비판이라면 아직 적당히 받아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현실의 거점에까지 손길이 닿으면 더는 좌시할 수 없게 된다. 신전은 결코 그냥 예배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거기에는 종교 권력의 중추가 있었다.

종교 사상을 열광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철학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서 인간의 모든 실천을 ‘근원적’인 종교 사상에서 생긴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이 위에 쓴 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종교적 확신에 열광적으로 사로잡혀 행동하면 동요와 미혹을 피할 수 없다. 늘 일관되게 같은 종교 사상에 열광적으로 사로잡혀 계속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서 래디컬하게 돌진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행동적으로 돌진하면 반드시 현실에 냉혹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고, 열광적 확신만으로는 그 냉혹함에 맞설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애써 자각적으로 사태를 다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솟구치는 미혹과 절망을 눈을 감고 무시하고, 더 열광 쪽으로 냅다 달려가는 자들도 역사상 많이 있었다. 그런 자들은 출발점에서는 래디컬하게 사회적 현실을 파고들 수 있을지라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의식의 절반을 잠재우려 하는 순간부터 선동가demagogue로 변신한다.

만일 정말로 예수가 메시아로 자각하며 살았다면 이미 이야기했듯이 살아 있는 인간의 삶으로서는 꺼림칙한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이상한 느낌에서 비롯되는 폭넓은 동요와 미혹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살아 있는 인간은 이런 현실의 한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초월할 것이다. 초월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인간이 자신은 초월했다는 망상을 품게 되면 거꾸로 그만큼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고통을 당한다. 즉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우쭐대며 살아간다면 그만큼 인간적으로 많이 왜곡되어 버린다. 이상하게 튀려고 하면 그 만큼 여러 가지로 굴절되게 된다. 메시아로서의 자각을 지닌 인간 예수를 묘사하려 하면 오히려 점점 더 그로 인한 인간적 약점이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세간의 도덕이나 종교 질서의 추잡함을 보기 좋게 꿰뚫고 있다. 종교 의례로 정해진 단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제하고,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금욕의 정신을 남 못지않게 설교도 하는 마을의 유지나 아는 체하는 ‘선량’한 사람들은, 그 금욕의 정신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요한과 같은 인물이 출현하자, 그 준엄함 앞에서 맞대 놓고 욕을 하지는 못하고 뒤돌아서서, 저런 상궤를 벗어난 무서운 놈은 악령이 든 게 틀림없어 라는 둥 술 마신 기운에 점점 더 심한 말을 한다. 그런데 단식이 어떻다느니, 하느님을 섬기려면 조신해야 한다느니, 금욕이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전부 걷어차 버리고 즐겁고 느긋하게 마시고 떠드는 예수라는 인간이 출현하자, 자신들의 질서를 해쳤다며 정색을 하고 대들며, 저 놈은 타락했다, 예의도 모른다고 욕을 한다. 매번 낯익은 풍경이다.

예루살렘 신전을 통한 종교 지배 구조를 대표하는 시의회(산헤드린)의 사람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에 와 있을 때 붙잡아서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위가 있기에 그런 일을 하는가’라고 힐문했다. 이 또한 흔히 있는 광경이다. 알맹이가 없는 주제에 권력을 등에 업고 으스대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우둔하고 종잡을 수 없는 엉터리 짓은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이 조금이라도 그들의 속이 텅 빈 권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듯한 지점까지 날카롭게 정의를 주장하면 묘하게 격분해서, 당신, 당신, 누구의 허락을 받고 그따위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라며 참견하고 싶어 한다.

예수의 역설적 반항의 예리함을 잘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제자’들보다 이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예수 사후에 예수가 그토록 혐오했던 예루살렘 시내에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그리스도 교단을 만들었던 제자들은 그녀들과 달리 예수가 체포당할 때 후다닥 잽싸게 도망쳤으며, 그 처형이나 매장 현장에도 없었다.

복음서는 모두 로마제국 지배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쓰였다. 그 의도가 부수적으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상당히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로마의 대관 필라투스가 적극적으로 예수를 처형하려 했다면, 예수를 교조로 받드는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에 대한 ‘범죄자’의 종교라는 꼴이 되므로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렇게는 쓰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필라투스는 처형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유대교 당국의 압력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처형했다는 것으로 해 두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필라투스는 예수를 ‘무죄’로 간주했다는 식으로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이 로마제국에 대한 호교적인 자세는 이미 마르코에 어느 정도, 그리고 마태오와 루카에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 호교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십자가라는 로마제국의 사형 수단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사실까지는 말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난 이야기의 화자도, 후세의 신학적 해석자들도 단말마의 예수의 너무나도 무참한 의식과 대면하며 두려워 떠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런 해석자들의 의식 속에서 예수는 ‘부활’당한다. 그다음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의미 부여가 시작된다. 결국 예수라는 구원자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라고들 이야기하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의 저런 삶과 활동의 결말로 저런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살았기 때문에, 저렇게 무시무시하게 죽기에 이르렀다. 아니 오히려 저렇게 무시무시한 죽음이 예기(豫期)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냈다고 해야 할까. 예수의 죽음에 희망이 있다면 죽음 자체 속에서가 아니라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면서 활동을 계속한 모습 속에 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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