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은 교부들이 주장하듯이 교회적이어야 한다. 성경 해석은 기도와 예배라는 맥락에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행하는 활동이다. 사사롭거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활동이다. 교부들의 성경 해석의 본질은 교회와 공동체, 헌신과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성경 연구자들, 특히 현대 학문 기관의 해석학 기법을 훈련받은 사람은 이런 사실에 놀랄 것이다. 모든 교부들이 주장하듯이, 경외심을 갖고 성경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에게 성경 본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한마디로 말해, 교부들은 시종일관 성경을 거룩한 책으로 다룬다. 성경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존중하고 그 메시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성경의 풍부한 내용을 제대로 캐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수백 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의 통찰과 해석 방법이 21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현대에서 교부 세계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본다. 교부의 세계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세계라는 두 가지 해석 세계를 하나로 잇는 첫째 단계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어떤 경향을 보이는지 물어야 한다. 이러한 예비 작업을 한 후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교부의 해석학적 견해와 방법론을 연구할 것이다. 교부들의 해석학적 관점은 오늘날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들을 기꺼이 보완해 주고 뒷받침하고 때로는 비판해 줄 것이다.
--- p.13
교부를 신뢰할 수 있는가? 사실 이 물음은 여러 다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다. 교부들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는가? 교부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화적, 종교적 맹점 때문에 복음의 진수를 오해한 것은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은 중세 후기의 로마 가톨릭의 폐해가 교부들의 사상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자문했다. “오랜 세대를 거쳐 인정받아 온, 덕망 있는 교부들에게 의지하는 것의 유익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모두 눈먼 자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바울이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했던 말을 그냥 넘겨버리지 않았는가.”
루터는 교부들을 기꺼이 버리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글에서 언제나 교부들과 대화했다. 그는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에 의지했다. 루터가 교부들과 함께 성경을 읽을 때 사용한 방법론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 루터에게 더 충실할 수 있다. 루터는 교부들이 잘못했다고 느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교부들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했으며, 교부들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느낄 때는 교부들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 p.15-16
오든은 교부 사상을 연구하면서, 교회의 예배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신학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세월과 문화, 언어를 가로지르는 교제인 예배 공동체에서 말이다. 하지만 오든은 교회의 삶과 반성에서 면면히 남아 있는 주제와 관례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일에 대한 “일치된” 이해였다. 오든은 교회 공동체와 그 축적된 역사와 전통이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을 알았다. ...... 오든은 “새로운 방향 설정”과 “해석학적 반전”을 경험했다. 여기서 그는 “근대 이전의 텍스트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오든은 해석학이 성품, 성향, 순종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점을 교부들이 강조했음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텍스트에 귀 기울이고 텍스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해석학적으로 배운 가장 중요한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고 오든은 말한다. “칼 로저스는 나에게 내 경험을 신뢰하라고 가르쳤다. 고대 기독교 저술가는 나에게 성경과 전통이 내 경험을 바꾸어놓을 것을 믿으라고 가르쳤다.”
오든이 현대 신학에서 “고전 정통”Paleo-Orthodoxy으로 향한 순례는 주목할 만하다. 오든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신학자와 성경학자들이 매우 많다. 그들 대부분은 비교적 젊다. 그래서 오든은 그들을 “젊은 구닥다리”라고 부른다. “젊은 구닥다리들”이 왜 이렇게 넘쳐나는가? 왜 많은 사람이 성경을 현대적 방법으로 읽고 해석하는 데 불만을 품는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어떻게 읽는지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이 중요한 물음에 답할 수 있다.
--- p.23-25
되돌아보건대, 철학과 신학에서 계몽주의의 낙관론은 우리의 감성에 충격을 주었다. 물론, 계몽주의 원리 가운데 중요한 정치 개혁과 기술 발전에 이른 원리도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 관점에는 가장 충격적이고 어려움을 주는 요소가 있으니, 이성이 자율적으로 작용한다는 소박한 확신이다. 이성이 개인의 성향과 사회와 문화라는 맥락, 종교 공동체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주장에 도전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철학과 해석학만이 아니다. 고전적 기독교도 이러한 주장이 근본적으로 타당한지 의심한다.
서양 신학 전통의 기본적인 격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의 배관을 통해 흘러온다. 믿음이 이해에 이르게 한다는 격언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는 믿음이며, 계속되는 자기기만이라는 유혹을 의식하는 데 근거를 두는 믿음이며, 성경의 권위에 뿌리를 두는 믿음,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성경이 전달하는 계시에 뿌리를 두는 믿음, 하나님이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 교회가 숙고해 온 역사가 키워준 믿음이었다.
--- p.35
아타나시우스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주석이나 신학은 교회의 삶이나 개인의 영적 성장과 동떨어진 성경학자나 신학자의 학문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교부들은 교회 내에서 가장 좋은 주석이 생긴다고 보았다. 주석은 교회 공동체에서 읽히고 설교되고 들리고 이해된다. 또한 기도와 예배, 명상과 자기 점검, 고백을 통해 선한 품성을 계속 형성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몸인 교회에 전달되는 수단을 통해서 품성을 계속 형성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라야 성경을 안전하게 해석한다. 교부들에 따르면, 성경 연구가 개인적 품성이나 기독교 공동체와 동떨어지면 성경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치명상을 줄 것이다. 그만큼 성경 연구는 전체적이고 공동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전체적이고 공동체적인 접근은,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전문화되고 파편화된 우리의 세계에서, 성경을 근접해서 탐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방법이 분명하다.
교부들은 성경에 접근할 때, 영적 건강과 정직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우리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할 충고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우리는 파편이 아니다. 교부는 전체성과 정직성을 요구한다. 교회 공동체에서 성경 이야기에 따라 우리 삶을 만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이는 교부가 주석 작업을 어떻게, 왜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래야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훨씬 더 충실하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다. 영적 성장이나 성품 형성과 성경 이해 사이의 변증법은 교부의 핵심적인 통찰이다. 다음 장들에서 이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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