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찾기 위해서는,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와 양심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습관과 태도에 대한 지속적인 분별이 필요하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좀 더 ‘깊이’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우리 몸에 밴 습관과 태도를 살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는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바깥’에서 오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익숙한 사고방식, 감정, 행동방식에 비판적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일정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새롭고 신선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이에 맞추어 삶을 바꾸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습관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지요.
--- p.15
참되고 맞갖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특성, 그러한 예배를 모색할 때 관심을 기울여야 할 특성 네 가지는 경외awe, 기쁨delight, 진실함truthfulness, 희망hope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때문에 ‘감각’sense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들은 우리가 한데 모여 성서를 읽는 자리에서, 세례반(세례대)baptismal font에서, 제대Altar에서 기도하고, 찬양
하고, 복음을 선포할 때 울려 퍼지는 주제들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이 네 가지 특성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왜 이 특성들이 사라지고 희미해지는지를 살피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예배에서 이를 다시금 회복하거나 심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경외, 기쁨, 진실함, 희망의 회복과 몸의 감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예배는 듣고, 보고, 만지고, 움직이고, 냄새 맡고, 맛보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교 예배는 일정한 문화의 영향 아래, 사회 가운데서, 몸을 통해 구현되기에 감각에 제약이 있는 경우에는 그만큼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기도와 노래는 우리 마음의 언어를 구성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활동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전례 활동Christian liturgical action이라는 비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언어는 우리 몸의 감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우리 몸의 감각, 느낌, 복잡한 감정이 하느님을 감지하는 것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다루려 합니다. 분명한 점은 하느님에 대한 영적 앎은 성령께서 주신 사회적 몸social body, 즉 교회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거쳐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 p.18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 사이의 간극은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예배에 끝없는 긴장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와 찬미를 올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편, 자기를 내어주신 하느님에 대한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로 모이는 하느님의 이야기(창조, 언약, 예언, 성육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기억하는 활동을 포함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려줍니다. 이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p.77~78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겸손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진정 우리는 참된가? 진실한가?’라고 잘 묻지 않습니다. 망각과 기만이 삶의 방식에 스며든 오늘날 문화에서는 이를 묻기가 더 힘들어졌지요. 정치권에서 홍보담당자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예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작은 일에는 거짓을 말하거나 부정직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상대 뒤에서 흠집을 잡는 일에 능합니다. 상대를 향해 ‘보수’나 ‘진보’라는 꼬리표를 붙여 비난하는 일도 손쉽게 하곤 하지요. 마찬가지 맥락에서 ‘복음주의’와 ‘가톨릭’ 신자들, ‘설교 중심’의 예배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성사 중심’의 예배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서 배우기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만 골몰하지요.
--- p.83~84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북미지역에서 비교적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이 보이는 공손함과 낙관주의는 교회 생활 속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찬미, 기도, 설교가 순진한 낙관주의를 그리스도교에서 전하는 희망으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점점 더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위안과 위로만 제공한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반쪽짜리 복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배에서 우리가 은총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지 않고,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강화한다면 복음은 완전히 망가질 것입니다.
---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