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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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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여름

[ EPU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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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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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년 05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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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75.56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26.5만자, 약 8.4만 단어, A4 약 166쪽?
ISBN13 9788925522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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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쾌청하게 맑다. 태양은 층수 높은 집합주택이 늘어선 거리를 벌꿀색으로 비추고 거리에 짙은 그림자를 또렷이 드리웠다. 곳곳의 굴뚝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문이 쾅쾅 열렸다 닫히고, 사람들이 움직이고, 태엽을 감은 장난감처럼 도시가 살아 숨 쉰다. 길바닥에 깐 돌이 상할 대로 상한 길에 발부리가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걷는데, 눈앞에 벌거숭이 아이가 불쑥 뛰쳐나오더니 바로 뒤에 어머니임 직한 여성이 따라 나와 아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말없이 스웨터를 입히자 까치집 지은 어린애의 머리가 구멍으로 쑥 빠져나왔다.
카페가 문을 열고, 하얀 앞치마를 두른 노인이 칠판 앞에 웅크려 앉아 몽땅한 분필로 ‘오늘의 아침, 호밀빵 포함 콩 수프 20마르크, 소시지 100마르크, 진짜 쇠고기 수프 120마르크’라 고 적었다. 카페 의자에 앉은 사람은 대부분 군복을 입은 적군 장교다. 그 앞을 중년 여성이 세탁 봉투를 쌓은 짐차를 끌고 지나가고, 작은 여자아이가 돌멩이를 늘어놓고 “한 개에 20마르크야.” 하며 소꿉장난을 했다. 길모퉁이에는 소련의 붉은 깃발을 단 배급차가 서 있고 제각기 접시를 든 독일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은 중간부터 지수전 앞에 늘어선 줄과 뒤섞여 꾀죄죄한 헌팅캡을 쓴 남자가 어느 쪽이 어떻게 줄을 섰는지 알 수가 없다며 투덜거린다. 두 량짜리 노면전차가 묵직하게 천천히 달려와 만원인 칸에 승객을 더 태우자 사람들이 출입구에서 삐져나왔다. 그렇게 살아가는 독일인 대부분이 오른팔이나 가방 혹은 몸 어딘가에 하얀 천을 둘렀다. 항복의 표시다.
--- pp.84∼85

진녹색 군용 트럭 옆을 걸을 때 달리지 않으려고 자신을 타 일렀다. 그 시절처럼. 숨어 지내던 이다에게 식사를 나르던 나 날 동안 나는 절대로 뛰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미군은 친위대나 비밀경찰과는 다르다. 설령 들통나더라도 사정도 듣지 않고 단두대에서 목을 매달거나 총으로 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알지만 안으로 침입한 뒤부터 심장이 불안으로 터질 것 같았다.
U.S.ARMY의 하얀 스탬프를 차체에 찍은 군용 트럭 운전사는 더러운 양말을 창문으로 내밀고 군 기관지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를 읽었다. 다음 트럭은 빈 짐칸에서 병사가 트럼프 카드로 포커에 열을 올리고 있고, 다음 UNRRA 트럭은 운전석 문을 열고 팔짱을 낀 민간인 남성이 코를 골며 꾸벅꾸벅 졸고 있다. 왼쪽 어깨 아래에 UNRRA의 빨간 와펜이 달려 있었다. 나는 전후좌우를 확인하고 와펜을 손으로 잡았다. 운 좋게도 대충 꿰매 붙였는지 실이 뜯어져 살짝 당겼을 뿐인데 빨간 실이 천에서 스르륵 빠졌다. 그가 깨지 않도록 신중하게 와펜 을 뜯고 웃옷 뒤에 신분증을 고정했던 안전핀을 풀어 신분증은 가방에 넣고 핀으로 웃옷 왼쪽 어깨에 와펜을 고정했다.
트럭이 가려서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에는 접이식 테이블 몇 개를 내놓고 화물 분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각각 ‘의류’, ‘일용품’, ‘식량’이란 종이가 붙어 있다. 빠른 말로 떠들면서 분류하는 여성들 틈을 봐서 나는 쌓인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군인과 자선조직 직원에 섞여 서쪽 구획으로 들어갔다. 구획 입구에도 게이트가 있어 흑인 공병이 트럭과 통행하는 사람을 검문했다. 병사식당 개수대 담당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지만 계급장은 특기중사로 신분은 훨씬 위였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면서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영어 응답을 시뮬레이션 하고 열려 있는 게이트로 돌진했다. 나에게는 수상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허가받은 인간이다.
그런데 내부까지 한 걸음 남았을 때 공병이 “이봐, 거기!”하고 불러 세웠다.
--- pp.274∼276

수상한 남자는 느닷없이 지기 뒤에서 덤벼들어 지기는 자세를 바꾸지 못하고 땅바닥에 얼굴을 찧었다. 본 적 없는 낯선 남자다. 얼굴은 수염으로 덮였고 형형히 빛나는 눈 아래에는 다크서클이 있어, 누가 봐도 페르비틴인지 뭔지 모를 약물 중독자였다. 더러운 속옷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장화를 신었다. 특징 있는 부푼 바지와 장화는 친숙했다. 친위대의 제복이다.
남자는 힘이 쭉 빠진 지기 위에 올라타 한 손을 쳐들었다. 칼날이 긴 나이프가 달빛에 번뜩였다.
“그만, 멈춰요!”
내가 외치고 모닥불에서 불붙은 가지를 꺼내 던졌다. 남자 는 잠시 움츠렸다가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손에 든 나이프의 손잡이는 해골 모양이었다.
“그 사람을 죽이지 마! 저리 가!”
친위대의 망령이다. 전쟁이 끝난 줄 모르든, 아니면 알고도 인정하고 싶지 않든 제국의 잔상에 들러붙은 망령이었다. 남자는 지기에게서 손을 떼고 나를 응시하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오른손의 나이프 칼끝을 나를 향해 곧장 들이댔다. 나는 다시 한번 모닥불에서 불붙은 가지를 꺼내 쥔 채 경계하고, 지기는 지기대로 신음하면서도 손을 뻗어 친위대 망령의 장화를 붙잡았다.
화난 망령이 지기의 옷깃을 끌어 올렸을 때, 나는 옆에 있던 라이플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다음 순간 귀청을 찢는 총성이 울리고 둥지에서 잠든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모든 우듬지에 서 도망쳤다.
남자는 무릎부터 쓰러져 쿵 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에서 해골 장식의 나이프가 떨어진다. 오랜만에 맡은 화약 냄새, 거친 숨소리, 일어나는 지기. 구덩이의 흙벽에 기댄 지기의 품에 라이플이 있었다.
“설마 쏜 거야?”
“…쏘면 안 돼?”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라 천천히 사라진다. 친위대 남자가 고꾸라지고 땅에 피가 서서히 퍼진다. 눈을 뜬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 pp.333∼335

가능한 일이라면 이대로 머물고 싶다. 이제 곧 에리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긴장감에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이미 결심한 거라고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일러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옆에는 지기가 앉고 그 맞은편에 베스팔리 하사가 군인답게 등을 곧게 펴고 서 있다. 호두나무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지기에게 어쩐 일로 하사가 먼저 말을 붙였다.
“당신은 체포되지 않나?”
지기는 머리 뒤로 깍지 낀 손을 풀고서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당신은 사람들을 속였다. 반유대주의에 가담했다. 노농적군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NKVD에서는 그런 자를 단속한다. 지금 독일도 그렇다. 모두 수용소로 간다.”
“아아…”
깊고 긴 한숨을 쉬고 지기는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가늘고 긴 이파리 한 장이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가지와 가지 사이에 둥근 기생목이 자리 잡고 있다.
“정직하게 이름을 대면 체포되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나서지 않나? 비겁하다. Хамство.”
“비겁?” 지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비겁한 게 뭐. 나는 귀감이 되기는 싫어.”
쏟아질 듯이 파란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간다.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의 좁고 네모난 하늘을 비행기가 일직선으로 구름을 끌면서 날아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가는 길인지 돌아오는 길인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상상한다. 저 비행기에 누가 타고 무엇을 위해 하늘을 날고 어디에 도착하려는지.
--- pp.447∼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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