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얘기를 하나의 훈시로 받아들이고 내 인생을 다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니면 그 변명은 역시 나의 따분한 테크닉에 대한 우회적인 배려였을까. 그녀가 지금도 내 친구라면, 어떻든 네 말이 옳았어, 하고 전해주고 싶은데, 이제 얼굴조차 거의 잊고 말았다. --- p.11
소년 시절에 기누가사 사치오 선수와 직접 해후하지 못한 기누가사 사치오가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건 어쩌면 그 이름을 버리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작가가 되면서 ‘쓰무라 케이’라는 필명을 썼다. 작가 쓰무라 케이는 데뷔한 이후로 아주 친근한 상대에게조차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 p.16
인간은 ‘참담한 일을 당했지만 그걸 극복해냈다.’ 하는 타인의 스토리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개개인이 직면한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원기 회복제로? 아니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심심풀이로? 어느 쪽이든 사치오가 만들어내는 허구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면 몰라도,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그 재료가 될 수 있다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기누가사 사치오는 틀림없는 피해자였다.--- p.73
어차피 별거 아니겠지 하고 우습게 여긴 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다 보이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거지. 세계의 진화 따위보다는 보이는 걸 제대로 보는 게 사실은 더 어려운 법인데. --- p.165
심했죠. 너무 심했어요. 왜 우리는 소중한 것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지. 눈에 보이는 신호를 무시하고, 잡았던 손도 놓아버리고. 언제나 기회를 날려버리죠. 왜 이렇게 맨날 헛발을 디디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지. 정말 끔찍합니다. 책을 읽어도 돈을 벌어도 전혀 현명해지지를 않으니. 언제까지 이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건지. 이제 넌더리가 납니다. 아주 넌더리가 나요. 정말이지 살아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요. --- p.284
살아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거야. 허접한 생각, 입에 담을 수 없는 한심한 생각도. 그러나 생각했다고 해서 그게 다 현실이 되는 건 아니야. 우리는 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을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자신을 아끼는 사람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지. 깔보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는 거야. 안 그러면 나처럼 돼. 나처럼 사랑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 되는 거라고. 쉽게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헤어지는 건 순간이야. --- p.306
사랑해야 할 날들에 사랑하기를 게을리 한 대가가 작지 않군. 대신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공존은 상실을 치유하고, 할 일을 늘려주고, 새로운 희망과 재생의 힘을 선물해주지. 그러나 상실의 극복은 바쁜 일이나 웃음으로는 절대 성취되지 않아. 앞으로도 내 인생은 당신에 대한 회한과 배덕의 자책감으로 지배되겠지.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한들 용서해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쪽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욕하고 동정하든, 그 목소리 역시 내게는 들리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그뿐이지. 우리는 둘 다 살아 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봤어. --- p.323
‘살고 있으니까, 살아라.’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하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런 건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누구에게든 필요해. 살아가기 위해, 마음에 두고두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군. 타자가 없는 곳에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생은 타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