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흘러온 한국 현대사의 굴곡마다 외국의 스파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의 선봉에 서서 한국 정부와 국제여론을 자신들의 국익에 맞도록 은밀히 조종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럼에도 그들의 실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행한 일들은 모두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어야 하는 비밀들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남겨진 기록도 철저한 비밀 관리 시스템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 미국과 일본, 영국이 오래된 국가비밀 자료들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면서 역사의 이면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의 발달로 해외에 가지 않아도 안방에 앉아서 해외자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그리고 김구, 이승만, 김원봉 등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스파이 활동에 맞서 미국, 중국의 정보기관들과 손잡고 일제에 강점되어 있는 한반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비밀공작을 전개했다.
유교 기반의 전통사회를 고집해오던 조선이 열강에 의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의 근현대는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주변 4강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교차지점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이 가져온 운명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근현대사는 주변 4강의 영향을 빼고는 온전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한국의 문제를 한반도 내부의 시각으로만 볼 경우 문제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무척 어렵게 만든다. 한국사의 완전한 이해와 균형 있는 시각을 세우기 위해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4강의 사료를 골고루 섭렵해야 한다. 하지만 연구자 한 명이 4개국 언어를 통달해서 4개국의 자료를 모두 해독하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 인간적 현실이다.
그에 따라 한국의 국가정보활동에 대한 연구 역시 비교적 자료가 풍부한 미국, 영국 중심의 자료를 바탕으로 접근한 결과 이들 나라 중심으로 연구가 치우친 경향이 있다. 한국이 놓인 지정학적 특성, 한국적 국가정보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필자는 이러한 편향성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국가정보의 역사를 한국적 시각에서 고찰해보고자 했다. 그러한 동기에 따라 필자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5년간(2016.9.-2021.8.) 한국적 국가정보이론 수립에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의 정보 인물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검증·분석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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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해방 후 남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간첩학교를 설립해서 남파 공작원을 양성, 남으로 내려보냈다. 해방 직후 소련은 북한,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적어도 9개 이상의 간첩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들은 소련의 각급 기관에서 기관별 이해에 따라 설립됐지만 모두 남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해 설립됐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체포 간첩들의 진술을 근거로 주한 미 방첩대가 파악한 학교 운영현황을 보면 1947년 7월 기준으로 소련은 평양을 비롯하여 함흥, 혜산진 등 북한 곳곳에 간첩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1996: 19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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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박정희 정부는 정변 직후 김종필 주도로 중앙정보부(중정)를 창립하면서 ‘조정관’ 제도를 신설했다. 현대판 암행어사였던 중정의 조정관은 은밀히 활동하면서 국민들의 대정부 불만사항, 정부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 민심의 변화 등을 세밀히 조사해서 통치권자에게 보고하고, 통치권자는 이를 바탕으로 문제점 있는 정책들을 보완하고 시정해나갔다.
박정희 정부가 국내정보의 효율적 운영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박정희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박정희는 자신이 군에서 가장 존경했던 인물인 이용문 장군의 아들 이건개 검사를 서울경찰청장으로 임명하면서 독대, 심층적인 국내정보 수집을 당부했다.
내가 국민들로부터 비난받는 사안이 있으면 그 사실을 직접 보고하고, 또한 정부 내의 정보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 등이 권한을 남용하여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사실이 있으면 그것도 남김없이 보고해주기 바라네. 그것이 국민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중략)…수도경찰 책임자로서 국정의 밑바닥을 상세히 파악하여 나에게 올바른 보고를 해주기 바라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자신 있게 국가라는 큰 배의 선장으로서 험난한 바다의 파도를 헤치고 배의 항로를 결정하여 역사의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을 것 아닌가. 올바른 보고가 없으면 나는 마치 국정 현실과 동떨어진, 현실감도 없고 생명력도 없는 로봇이나 인형 같은 존재로 전락할 것이야(이건개, 2001: 24).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1979.10.26.)이 일어나면서 중정의 조정관 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를 기반으로 집권한 신군부세력은 보안사 요원들을 중정 조정관을 대체하는 인력으로 활용했다. 안전기획부(안기부, 중정의 후신)의 조정관 제도는 살아 있었지만 10·26 사건을 겪으면서 입지가 약화됐다. 그 결과 보안사, 안기부, 경찰의 3개 국내정보 파트 요원들이 경합하면서 활동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3개 기관 정립 시대는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사건(1990.11.4.)이 일어나면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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