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17살이었던 나는 ‘오’ 리그에서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참가한 게임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의 눈에 띌 일도 없었다. 9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거울 앞으로 가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제서야 온타리오 리그에서 나를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지탱해오던 어린 시절의 꿈이 내 정체성과 더불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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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리가 서류상으로 캐나다 사람이지만 엄마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다. 엄마는 고국에 대한 사랑을 결코 버린 적이 없었다. 엄마는 우리를 ‘한국인답게’ 키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엄마의 눈에 우리 형제는 뿌리를 잊고 서구화되어 버린 아이들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였다. 동양의 외모에 서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우리가 동양의 외모, 동양의 마음 그리고 케이크에 아이싱을 바르듯 표면적으로만 서양의 냄새가 풍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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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 큰 뜻이 있다고. 어려움은 너를 성장시키기 위해 찾아 온 거야.”
모든 일에는 다 뜻이 담겨 있다는 말은 나에게 깊이 와 닿았다. 사실 그 동안 나는 막연하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에는 어떤 깊은 의미가 있고 배울 점도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더욱 우울해졌을 뿐 아니라 너무도 인생이 일방적이고 엄격하기만 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서울대학교에서 보낸 시간들은 나를 더욱 성장시키고 강하게 해 주었지… 나는 내적으로 더욱 강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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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몸과 마음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공책에 써내려간 이야기의 음역에 대한 감각을 악보도 없이 발전시키는 것과 수십 쪽에 이르는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학교 숙제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신적인 활동을 필요로 했고 더 큰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잘 못했어도 여전히 판소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판소리는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내게 큰 영감과 의욕을 북돋워주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나는 지금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풍전등화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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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의 말투와 억양을 완전히 숙지했다. 무질서하게 ‘유목생활’을 하던 한국어의 대명사, 명사, 동사는 머릿속에 잘 정리되었고, 필요하면 아무 문제없이 동사는 문장의 끝에, 주어는 앞에, 목적어는 중간으로 신속하게 자기 자리를 찾았다. 낯선 소리를 분명하게 발음하는데 필요한 입 안쪽 근육의 군살도 빠져서 더 분명하고 더 민첩해졌다. 이제 외모도, 말투도, 행동하는 것도 한국인으로 보였다. 3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었으니 나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도 교포도 아니었다. 나는 마침내 나의 한국 이름인 쉑원으로 살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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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아버지는 전통적이고 엄격한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판소리를 공부할 때 받았던 교육방식이 바로 그러한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었고 그걸 통해서 비로소 나는 내가 그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신입생 때 해야 했던 ‘소감 한마디’ 발표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벌을 주는 것에 불과했다고 여겨졌지만 나중에 냉혹하기만 한 언론계의 환경 속에서 바로 그러한 발표가 동료들과 좀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언젠가는 최악의 순간이라고 여긴 것들이 사실은 최선일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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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자신을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친절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고통의 느낌을 일방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하여 관대한 지도자이기 보다는 자신의 고통을 내버려두지 않고 내쳐버리려고 하는 무자비한 독재자였다. 이렇게 고통을 혐오함으로써 나는 고통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지 않기는 커녕 적대감을 가지고 쿡쿡 찔렀다. 그리하여 나의 내면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이 창조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불안, 좌절, 낙담이라는 세 놈의 프랑켄슈타인이 창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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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머리 속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그래.’ 나의 감정을 판단한 순간은 원래대로라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흘러 들어오고 나갔어야 하는 곳을 둑으로 막아 쾅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흐르고 활력이 넘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나는 감정이 흐르는 길을 막고, 멈춰 세우고, 고정시켜서 활력을 잃게 만들었다. 한국말이 맞았다. 그것은 단지 ‘사랑’이어야 하는 거지 ‘내가’ ‘너를’ ‘사랑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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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것을 시도했으며 그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기는 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이 아마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의 전반부를 돌아보니 힘들 때마다 그것은 ‘나를 더 잘 되게 하는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의 힘은 소중한 인연들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인가.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꽃 피면 꽃 피는 대로 날마다 새롭지 않은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