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와 과테말라, 주변 마야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 그들의 삶과 정치경제,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지겹게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바로 유럽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그날이다. 그 당시 죽음과 고통에 젖은 애절한 사연,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현실, 사실의 기록, 악랄함과 사랑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이 역사에는 첫 키스 같은 짜릿함과 이어지는 배신의 광란이 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그들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가장 큰 흉터이자 가장 극적인 순간의 생생한 증언인 셈이다._송영복 (저자)
---「머리말」중에서
유까딴의 정부, 제사장, 과학, 문자와 책_이러한 마야의 책은 지금까지 일부만 남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꼬디쎄 드레스데(Codice Dresde)’ ‘꼬디쎄 마드리드(Codice Madrid)’ ‘꼬디쎄 빠리(Codice Paris)’로 세 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책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에스빠냐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에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 후 마야의 책들을 제작하거나 보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발견되는 즉시 모두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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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이전 유까딴에서 발생한 많은 재난 : 태풍, 역병, 전쟁 등_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힘을 내어서 건축물들을 짓고 땅을 경작하였으며 많은 자손을 번창시켰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은 좋은 기후에서 16년 동안 건강한 삶을 누렸다. 특히 마지막 해는 그 어느 해보다 더욱 풍요로운 해였다; 그런데 열매를 막 수확하려고 할 즈음에 전염성 열병이 창궐하였다. 이 열병은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역병이 돌고 난 후로 병에 걸린 사람들의 몸이 퉁퉁 붓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열매 대부분은 수확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p.102
원주민에 대한 에스빠냐 사람들의 잔인함_에스빠냐 사람들은 인디오들에게 전대미문의 잔혹한 행위를 벌였다. 코와 팔다리를 베어 내는가 하면 여자 인디오들의 유방을 도려내었고, 발에 호박을 묶은 채로 깊은 호수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엄마들처럼 잘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창으로 찔렀으며, 목쇄를 질러서 인디오들을 이동시키는 도중에 누군가 병이 들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잘 걷지 못하면 전체 행렬을 멈추고는 그 사람만 풀어놓는 수고로움을 피하려고 목을 베기도 하였다. 그들은 노동 목적으로 수많은 남녀-포로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데리고 왔다.
---p.132
인디오의 나쁜 습관들_이처럼 신부들이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고, 젊은이들을 교육했음에도 인디오들은 우상숭배를 주관하던 제사장과 촌장들에 의하여 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공양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공양에서 단순히 향을 피우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피를 바쳤다. 그리하여 신부들은 종교재판을 열었고, 알깔데 마요르(도지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수많은 사람을 잡아들였다. 그러고는 종교재판 형식에 준하여; 죄수들이 쓰는 고깔을 씌운 후 그들을 처형대로 보냈다.
---p.150
인디오의 그림과 문신_장인(匠人)들은 원하는 부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려 넣고, 그림 부분을 조심스럽게 찔러서 피와 잉크가 몸에 문신으로 새겨지도록 하였다; 엄청난 통증이 뒤따랐기 때문에 한 번에 조금씩만 문신을 하였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그 부위에 염증과 고름이 생겨서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하였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문신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롱당하였다. 인디오들은 자신들이 유쾌하고, 복을 타고났으며, 천부적인 재주가 있음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였다.
---p.177
잔인하고도 더러운 유까딴 사람들의 인신공양과 고행_볼에 구멍을 내기도 하였고, 아랫입술에 내기도 하였으며; 몸 일부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혀의 양옆으로 비스듬하게 구멍을 내서 지푸라기를 통과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또한 부끄러운 부위인 남성 성기의 포피에 상처를 내서 귀에서처럼 증표를 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할례의식을 한다고 인디아스의 역사가가 착각하였다. 그 밖에도 인디오들은 더럽고도 처참한 공양을 하였다. 피공양을 할 남자들은 신전에 모여 차례대로 서서 각자 성기의 측면으로 비스듬한 구멍을 냈다. 가능한 많은 실을 (구멍으로) 통과시켰고, 그리하여 모든 남자의 성기는 실에 꿰어진 상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의 성기에서 낸 피로 악마를 문질렀는데, 가장 많이 한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자식들 또한 어려서부터 이러한 일에 익숙해졌다.
---p.217
간음, 살인, 도둑질한 사람에 대한 징계와 형벌_간음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이곳 사람들 관습은 마야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조사 결과 간음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면 마을의 어른들이 촌장의 집에 모여서 간음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그를 나무 막대기에 묶어서 죄를 범한 여자의 남편에게 데리고 갔다; 만일 여자의 남편이 용서하면 죄인의 몸이 자유롭게 되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높은 곳에서 죄인의 머리 위로 커다란 돌을 떨어뜨려서 사형에 처하였다;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 죄로 인한 불명예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죗값을 치르기에 충분하였다.
---p.233
달력에 대한 설명_달(月)에 포함된 각각의 날(日)에는 앞서 이야기한 인디오들의 문자로 이름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달(月)이 모두 모여서 일종의 달력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달력으로 그렇게 하듯이 (인디오들도 그들의 달력으로 의례를 행하고 계산과 계약하였으며 거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달력은 한 해의 첫날이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달력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달(月)에 포함된 날(日)을 모두 함께 계산해야 하는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여기에 제시할 그들의 고유달력을 보면 알겠지만; 달(月)에 포함된 문자와 날(日)은 각각 20개인 반면 달력의 날짜를 셀 때는 1부터 13까지만 세던 관습이 있었다.
---p.284
마야의 연도_전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인디오들은 연도와 달(月)을 계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른 날짜와 시간을 계산하는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는 20년을 20씩 세어 나가는 것으로 1 아하우라고 불리는 날들에 해당하는 20개의 문자 중 하나로 13을 20씩(13×20) 계산하는 것이다. 다음의 원에서 볼 수 있듯이 차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어 나간다. 이것들은 인디오들 말로 까뚠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놀라울 정도로 그들의 나이를 잘 계산하였다. 그래서 첫 장에서 이야기한 노인 역시 300년 전 일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이러한 그들의 계산법을 알지 못했다면 오래전 일들을 그렇게나 쉽게 기억하는 것을 믿지 못하였을 것이다.
---p.3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