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은 왜 안토니오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칼날을 벼리는가?
--- p.4
햄릿, 맥베스,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 작품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문제적이어서 ‘물음’을 요구한다. 샤일록도 이들에 못지않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어떤 작품보다도 《베니스의 상인》에 문제적인 인물이 많다. 샤일록보다 더 문제적인 인물은,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다. 작품의 제목을 《베니스의 상인》으로 단 까닭이리라.
--- p.4
자비는 왕관의 지배보다 상위에 있네.
왕들의 심장에 앉아 있고, 신의 속성이기도 하지.
지상의 권력은 자비가 정의에 양념처럼 곁들여졌을 때
신의 권력과 가장 비슷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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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왜 이리 울적한지 모르겠군. 지쳤어. 지쳤단 말이 어울리지. 하지만 어째서 내가 이 병에 걸리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어. 이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도 아직 알지 못해. 이 멍청한 우울증이 내 자신을 알도록 고생을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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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바사니오도 베니스의 상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팔아서 여인의 유산을 사려는 자니까.
시우: 뭐야, 그럼 이들이 다 야누스란 말이야?
민기: 맞아. 셰익스피어가 살라리노의 입을 빌려 “얼굴을 앞뒤로 하고 있는 야누스에 맹세코, 자연은 이상한 자들을 만들어 놓았어”란 말을 맨 앞쪽에 박아 놓은 게 그런 뜻이었나 보다.
--- p.35
당시 기독교인은 돈을 빌리면서도, 유대인이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몇 푼 안 되는 이자를 받는다고 유대인을 죄인 취급했고, 또 예수님을 죽였다고 악마의 새끼로 여겼어. 그러니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 샤일록의 입장에선.
--- p.38
그 당시 유대인이 해도 되는 일은 거의 없었거든. 공적인 직업은 물론이고 수공업에도 종사할 수 없었어. 수공업 조합인 길드에 가입하는 게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으니까. 그들이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인이 하지 않았던 ‘대금업’ 정도였지. 또한 유대인은 게토라는 곳에 분리되어 그곳에서만 살아야 했어. 밖에 나갈 때는 늘 ‘다윗의 별’을 달지 않으면, 기독교인의 사사로운 폭력과 공권력에 의한 형벌을 받아야 했고.
--- p.71
민기: 사실이야. 부활주일 전 40일 동안의 기간인 사순절 기간엔 육식이나 술이 금지되니까, 그날이 시작되기 전 3~8일 동안 술과 고기를 진탕 먹고 쾌락을 맘껏 누렸지.
은유: 그럴 거면 ‘재’는 왜 바르고, 참회는 왜 해? 참회 문제와 상관없이 그냥 카니발을 즐긴다면 그럴 수 있어. 아니, 필요하지. 하지만 참회한다는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기 전에 ‘육肉의 향연’을 실컷 벌이고 그날을 맞이하자는 심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기독교인들, 정말로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자들이야.
--- p.81
나를 선택하는 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누릴 것이다.”(금 상자 위 글귀)
“그가 자격이 있는 만큼 누릴 것이다.”(은 상자 위 글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모험하고 내주어야 한다.”(납 상자 위 글귀)
--- p.94
내가 유대인이어서였소. 유대인은 눈이 없소? 유대인은 손이 없소? 내장이 없소, 몸이 없소? 감각도, 애정도, 열정도 없단 말이오? 기독교인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에 부상당하고, 같은 병에 걸리며, 같은 도구로 치유되고, 같은 겨울에 시원해지고, 같은 여름에 따뜻해지지 않소? 당신들이 우리를 창으로 찌르면 우리는 피가 안 나오? 당신들이 우리를 간질이는데도 우리는 웃지 않는단 말이오? 당신들이 우리에게 독을 먹이더라도 우리는 죽지 않는단 말이오? 그리고 당신들이 우리에게 해코지를 해도 우리는 복수하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가 다른 것에서도 당신들과 같다면, 우리는 복수에 있어서도 당신들을 닮을 것이오.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 해코지하면, 기독교인의 겸손은 무엇이겠소? 복수지.
--- p.115
누군가는 입 벌린 돼지를 싫어하고, 누군가는 고양이를 보면 화를 내죠. 그리고 누군가는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면 소변을 참지 못하죠. 애정, 열정의 여주인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기분에 따라 바꾸죠. 자, 답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입 벌린 돼지를, 다른 사람은 왜 무해하고 유용한 고양이를, 또 다른 사람은 양털 백파이프를 참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댈 수 없지 않습니까? 다만 어떤 힘에 의해 스스로도 불쾌해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할 수밖에 없듯이, 저도 꼭 그렇습니다. 이유를 대지도 않을 거고요. 오랜 시간 박힌 증오와 특별한 혐오를 안토니오에게 갖고서 저는 견뎌왔습니다. 제가 손해 보는 재판을 걸 정도로요. 답이 됐습니까?
--- p.170
그게 법입니까?
--- p.187
법률이 사용하는 언어라 하더라도 관습적인 언어 사용을 무시할 수는 없어. 만약 그렇게 하면 법률 적용이 거의 불가능할 거야. 가령 ‘학원비가 매주 2시간씩 수업하고 한 달에 10만 원’이라고 했다면, 강사가 단어와 단어를 이어가는 사이,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사이에 쉬는 순간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수업 시간에서 빼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 p.194
셰익스피어는 ‘광대’로 하여금 ‘심오한 진실’을 말하게 한 경우가 많아. 심오한 말을 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현실을 현실대로 보는 눈을 가진 광대 같은 사람이 진실을 안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
--- p.205
유대인 혐오는 십자군 전쟁 발발 즈음부터 급격히 불타올랐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을 죽인 자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이 퍼져나갔다.
--- p.239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1275년에 반유대 법안을 공포하고, 대금업을 금지했다. 유대인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고, 영국 전역에서 추방되었다. 이때의 유대인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셰익스피어(1564~1616년)가 살았던 시대까지도 영국 내 유대인의 숫자와 활동이 미미할 정도였다.
--- p.241
루터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을 “육체를 가진 악마”, “우물에 독을 타고, 아이를 찔러 죽인 자들”이라고 했으며, “교만, 시기, 폭리, 탐욕과 모든 음흉함”이라 낙인을 찍었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을 “집시들처럼 처리하라”고 했다.
--- p.243
백석·김우창·누스바움의 견해를 포오샤에 적용하면, 포오샤가 왜 샤일록의 깊은 절망에 공감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다.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이 샤일록으로 표상되는 유대인을 깊게 만날 수 없게 한 것이다. 즉 법정에서의 정의인 형식적인 정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 p.247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침략, 제2차 세계대전 때 또 독일의 침략에 의해 러시아인이 당한 피해와 학살은 말로 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군인 1000만 명, 민간인 1400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 p.256
이런 종교적인 혐오가 서방측에 “러시아 팽창주의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급기야 유럽인들은 러시아 황제의 ‘유서를 조작’하면서까지 그 신화를 퍼뜨렸던 것이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담론엔 서방측의 러시아에 대한 깊은 불신이 놓여 있다.
--- p.261